ADVERTISEMENT

책임자가 달랐다 … 조선 때 궁궐은 정승, 숭례문은 국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난해 11월 촬영한 숭례문 2층 문루의 동쪽 기둥. 단청 채색이 끝난 뒤 갈라져 1m 이상 위아래로 갈라진 틈으로 나무 속이 하얗게 보인다. 졸속·부실 복원의 상징이었다. 그로부터 5개월여, 문화재청은 문화재 수리체계 혁신대책을 9일 내놨다. 하지만 미흡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중앙포토]

올 1월 초 서울 미근동 경찰청에선 10여 명의 문화재청 공무원이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경찰 수사는 문화재청 공무원들과 지도층의 관리 소홀, 시스템 부재 문제는 제외한 채 숭례문·광화문 복원 현장을 책임진 대목장 신응수(71)씨의 금강송 횡령 혐의를 입증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달 26일 신씨는 검찰에 기소 의견으로 송치됐다.

 신 대목장 한 사람에게만 책임이 지워져 기소 의견으로 송치되자 문화재청의 한 공무원은 경찰 조사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가 눈으로 (공사 상황을) 일일이 확인합니까. 책임은 감리회사에 물어야죠.”

 당시 수사를 맡은 한 경찰은 “조사를 받은 문화재청 공무원 가운데 문화재 관리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이 9일 내놓은 ‘문화재 수리체계 혁신 대책’은 이 같은 ‘책임 의식 부재’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지적이 나온다. 혁신 대책에는 문화재청의 관리·감독을 강화하는 내용 대신 ‘수리 실명제’ 등 개별 기술자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항목이 대다수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 부실 복원의 상당수 책임은 문화재청이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데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실제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복원하면서 목재·기와 값 등 주요 자재비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본지 2013년 12월 2일 1면> 또 목재 값(7억5700만원)의 약 세 배에 달하는 과도한 홍보성 비용(21억원)을 숭례문 전시관 건립 등에 사용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경력 17년차의 한 목공 장인은 “문화재청 공무원들이 특정 시공사와 결탁해 문화재 관련 공사를 몰아준다는 얘기가 파다하다”며 “시공사와 결탁한 마당에 제대로 된 관리·감독이 가능하겠느냐”고 말했다. 경찰 수사에선 문화재청 공무원 6명이 광화문·경복궁 복원 시공사 J사로부터 4200만원 상당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문화재 복원 과정에서 감사원이 경직적인 감사에만 치우쳤다는 지적도 나온다. 감사원은 2012년 5월 숭례문·광화문 등 각종 문화재 보수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벌였으나 시공 방식 등에 대한 지적에 그쳤다. 문화재청 공무원들이 시공사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은 걸러지지 않았다. 특히 감사원은 공기와 예산 범위에서 공사가 진행되는지만 봤지, 고급 소나무의 수요나 인건비의 적정성 등은 따져 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요 문화재 복원이나 공사에는 별도의 책임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조선시대에는 궁궐이나 왕릉 등을 건립·보수할 때 오늘날의 국가위원회에 해당하는 ‘도감(都監)’을 두고 공사에 들어가는 인력과 물자 등을 일일이 관리·기록했다. 요즘으로 치면 국무총리급인 삼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도제조(都提調)를 맡아 공사를 총지휘했다. 장관급인 판서(判書)는 실무 책임자인 제조(提調)를 맡아 인력·물자·예산 등을 책임졌다. 그들의 지휘를 받는 일선 장인들은 공사의 잘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한서대 장경희(문화재보존학) 교수는 “숭례문 복원단장을 문화재청 국장이 맡고, 부실 복원의 책임을 현장 장인에게 돌리는 것은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며 “숭례문 논란의 1차 원인은 이명박 대통령 임기 내에 공사를 마치려 조급했던 문화재청장과 국무총리, 나아가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에게 있다”고 말했다.

 혁신 대책에 문화재 복원과 관련한 공기(工期) 문제가 빠진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숭례문 부실 공사의 결정적인 이유가 ‘무리한 공기’였기 때문이다. 공사기간을 대통령 임기 내인 3년으로 못 박으면서 공사가 무리하게 진행됐다는 지적이 많았다. 숭례문 복구 자문위원이었던 윤홍로 명지대 초빙교수는 “문화재 공사는 변수가 많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공사를 하도록 제도 개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처럼 내 집을 짓듯 힘을 쏟는 관리자가 있어야 이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혁신 대책에는 전통재료 인증제를 도입하는 등 전통 보존을 위한 대책도 담겨 있다. 하지만 전통 기법의 실질적인 적용을 위해선 장인 등 수리 기술자들의 임금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문화재 수리는 ‘문화재수리표준품셈’에 따라 인부들에게 임금을 지급한다. 2011년 개선된 표준품셈은 전동 공구를 사용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 기준대로라면 수작업 중심인 전통 방식은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셈이다. 낮은 임금 체계는 부실한 공사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 .

정강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