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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9. '조선책략'의 허와 실(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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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구한말 중국의 외교관 황준헌(黃遵憲.1848~1905)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은 당시 청나라.일본.러시아.미국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활로를 모색하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그 논지가 미국과의 연대를 처음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후 전개된 한국사의 방향을 고려할 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박노자 교수는 강대국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비판합니다.

이에 반해 허동현 교수는 청나라.일본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미국을 내세웠다는 점에 주목하며 오히려 현명한 책략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최근 친미와 반미가 중요한 논의거리로 떠오르면서, 우리 친미 의식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1백20여 년 전 주일 중국 공사관의 참찬관(參贊官)이었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이라는 소책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895년 청·일 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언론인 조르주 비고(Georges Bigot.1860~1927)가 파리로 돌아간 1899년 찍어낸 그림엽서 세트. 그림의 제목은 '조선을 둘러싼 일·청·러'(上), '러시아와 싸우라고 일본의 등을 떠미는 영국과 미국'(下).

1880년 황준헌이 조선의 수신사 김홍집(金弘集.1842~1896)에게 건네준 이 책에는 미국에 대한 긍정 일변도의 묘사가 담겨 있고,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하려고 노리는 러시아를 막으려면 반드시 연미(聯美:미국과 조약 체결.관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개 외교관이 며칠 만에 쓴 이 얇은 소책자는 대원군 시기 미국을 개와 양과 같은 자(犬羊之類)들의 땅이라고만 여겼던 조선 조정의 의식을 바꾸는 데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물론 오늘날의 친미론과 직접 연결시키기는 어렵지만 지금의 친미론이 배태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으로 인해 미국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고종과 그 측근들이 미국 선교사들을 호의적으로 대접해주었고, 그들이 세운 배재학당(1886) 등의 여러 미션 스쿨(선교사들의 학교)에서 이승만.신흥우.오긍선 등 각계의 친미적, 개신교적 지도자들이 배출됐기 때문입니다.

미션 스쿨의 초기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인맥은 결국 대한민국 건국 초기 지배층의 근골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조선책략'은 미국이 굳게 잠겨져 있었던 조선의 문을 열고 종교적.문화적으로 침투하는 데 하나의 열쇠가 되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조선 사회를 바꾸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이 소책자를 오늘날에 와서 다시 읽으면 묘한 느낌이 듭니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개명한 사람에 속했던 황준헌의 글을 한 번 봅시다.

"미국은 민주와 공화로써 정치하기 때문에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내지 않는다. 그리고 나라를 세울 당시 영국의 학정(虐政)으로 말미암아 발분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늘 아시아에 친근하고 유럽에 소원해왔다. (…)그 나라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국과 함께 하지만 땅이 동.서양 사이에 뻗쳐 있기 때문에 늘 약소한 자를 돕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를 끌어들여 우방으로 삼음으로써 도움을 얻을 수 있고 재앙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聯)미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당시 중국 외교의 책임자였던 이홍장(李鴻章.1823~1901)은 중국과 국경 분쟁을 일으키고 있던 러시아를 자신들의 속국인 조선을 침략하려는 나라로 지목하였고, 이에 대응할 가장 좋은 방아책(防俄策: 러시아를 막는 대책)으로 조선의 대미 조약 체결을 내놓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황준헌은 조선의 보수적인 지도층에게 대미 수교의 장점을 설득력 있게 납득시킬 의무를 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조선책략'에서 러시아를 악마로, 미국을 동양의 수호 천사로 그린 것은 상부의 지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외국통이었던 황준헌의 대미 의식은 실제 그 흑백그림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극동에서 상리(商利)만을 추구했던 미국의 궤변적이고도 형식적인 약속, 곧 거중조정(居中 調停:조약 체결의 상대 국가에 각종 외교적 도움을 줌)을 진정한 것으로 오해하였으며, 하와이 병탄.필리핀 침략 등 태평양 방면으로 세력 확장을 꿈꾸던 미국을 순진하게도 영토적 야욕이 없는 나라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무지와 오해가 '조선책략'과 같은 책자를 통해 조선에 옮겨와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고종과 대신들을 신미(信美)주의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1905년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가 고종의 애원을 무시하고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보호국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후에야 황준헌이 심어준 신미주의의 뿌리는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지요.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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