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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8)제51화 어린이와 함께 50년(3)어린이 독립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23년 5윌1일 천도교소년회·불구소년회·조선소년군을 중심으로「조선소년운동협회」에서 마련한 어린이날은 전국각지에서 거족적으로 거행되었다. 그 날의 감격을 그 때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어린이날-5월1일이 왔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외치는 날이 돌아왔다.(중략)이에 뜻 있는 몇 사람의 발기로 일어나게 된 소년운동협회라는 곳에서-「젊은이나 늙은이는 이미 희망이 없다. 우리는 오직 나머지 힘을 다하여 가련한 우리 후생 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주자」는 취지로, 오늘 5월1일을 어린이의 날로 작정하여 가지고 어린이를 위하여 일을 하자고 선전하는 동시에 다만 하루의 짧은 시간이라도 그들에게 기쁨이 있게 하고 복이 있게 하자는 오늘이라 한다. 그들에게 복이 있으라. 조선의 부협이여! 그들에게 정성이 있으라.』참으로 피가 뛰는 기사가 아닌가. 아니, 신문기사라기보다 어린이 독립선언문이었다.
그 해 기념식장에서 읽은 「소년운동 첫 선언」역시 세계에서 맨 처음 생긴 「아동헌장」 이었으니「제네바」선언이라고도 부르는「국제아동권리선언」이 「헌장」으로 채택된 것은 그보다 한해 뒤진 1924년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세계에 자랑할만한 우리들의 선언문에는 무엇무엇이 적혀 있었던가?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숨은 공로자인 소춘 김기전이 초한 선언문을 읽어보자.
『(중략) 일,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이,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삼,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함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계해 5월1일
소년운동협회
어린이의 권리를 찾아주려는 피맺힌 부르짖음이었다.
한편「어른에게 드리는 글」(해방의 복음) 과「어린 동무들에 주는 글」을 20만장 박아 그중 12만장을 서울 장안집집에 돌렸는데 어린이에게 당부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②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③뒷간이나 담 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④길가에서 때를 지어 놀거나 유리 같은 것을 버리지 맙시다.
⑤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⑥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⑦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도록 합시다.』54년 묵은 부탁이지마는 오늘 자라는 어린이에게도 그대로 일러두고 싶은 말들이 아닌가.
1924년 어린이날에는 천도교당에서 여러 아이들의 이름을 쓴 고무 풍선을 날리기도 하였다.
그것을 잡아 소년 운동협회로 가져온 어린이에게는 풍선에 쓰인 이름의 주인공과 함께 상품을 주었는데 계동 설정식의 풍선을 한강 이영희가, 누하동 고수련의 것을 수송동 이상합, 청진동 피천득 (지금의 영문학자)의 것을 침선동 김춘기가 잡아 왔었다. 어린 시절의 꿈을 둥둥 푸른 하늘에 날렸을 적 이야기다.
그러나 불행한 일로는 25년에 이르러 소년운동협회와 오월회(대표 정홍구)두 과로 갈렸다가 27년에 전국의 2백여 소년단체가운데 1백여 단체의 찬동(창립총회참가는 52단체 96명)으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 방정환)로 도로 뭉쳤었는데 28년에 가서는「조선소년총동맹」으로 탈바꿈을 하고, 정홍교가 위원잠자리를 차지, 방정환은 일선에서 물러나 버렸다. 5월1일은「메이·데이」(노동절)와 마주칠뿐더러 보통 날이면 어린이를 모을 도리가 없어서 28년부터는 「5월 첫 공일」로 날을 새로 받았으나 28년에 이르러서는 집회가 금지되어 「어린이 없는 어린이날」이 해방되던 해까지 되풀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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