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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 정치로 백악관을 겨눈 미 민주당 「카터」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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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서고 있는 「지미·카터」가 작년 1월 출마를 선언했을 때 만해도 「지미」라니 도대체 누군가?』라는 것이 미국 사람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카터」는 백악관의 문밖까지 당도하여 「포드」에게 집을 비우라고 호령을 하는 처지가 됐다.
민주당의 두 강자 「험프리」와 「잭슨」이 대통령 후보 경쟁에서 사퇴할 뜻을 밝힘으로써 「카터」 전 「조지아」주지사의 후보 지명은 거의 확실해졌다. 당내에서는 「카터」지지 세력이 부쩍 늘기 시작했고 당의 재단결도 궤도에 올라서게 됐다.
특히 공화당에선 「리건」의 「텍사스」 예비 선거에서 「포드」를 일방적으로 물리쳐 승리함으로써 당내 혼동을 일으켜 상대적으로 「카터」를 한층 이롭게 하고 있다. 「카터」가 이 같은 결정적인 돌파구를 찾은 것은 「펜실베이니아」주에서였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잭슨」과 「유들」의 연합군이 쌓은 「카터」 저지의 「마지노」선을 무너뜨려 「카터」의원은 지금까지10개 예비선거 중 8개 지역에서 승리,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펜실베이니아」의 승리를 「결정적」이라고 부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0개중 8개주 승리>
남부 출신의 「카터」가 공업화 북부의 주에서 이긴 것은 「펜실베이니아」가 처음이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북부의 공업화된 주들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선거에서 당선될 수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잭슨」의 소위 「큰 주 중심 작전」이 여기서 와해됐다. 「잭슨」은 지금까지 「카터」가 북부 공업 지역의 주에서는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인물이고 따라서 흑인·노조소속 근로자와 진보파의 대연합을 당선 기반으로 하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는 실격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 예선 결과에서 나타난 계층별 투표 성향을 보면 근로자들은 40-28-14%의 비율로, 그리고 흑인들은 38-30-16%의 비율로 「카터」 「잭슨」 「유들」에게 투표했다. 여기서 「잭슨」의 주장은 무효 선언을 받은 것이다.
동안에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내고 소리 없이 활짝 웃는 함박 웃음으로 의젓하게 틀이 잡힌 「카터」는 선견지명이 어지간했던 것 같다.
그는 출마를 고려할 때부터 「워터게이트」에 착안한 것이다. 올해의 대통령 선거에서만은 상원의원보다는 땅콩 장수의 간판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카터」의 생각이 맞아 들어간 것 같다.
그가 자기의 성실성과 정직을 높이 치켜들고 「워싱턴」 정치 풍토에 물든 사람들을 멀리 하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도 「닉슨」의 「이미지」를 상기시켜서 「워터게이트」사건을 이용하겠다는 전락이다. 「카터」를 융통성 없는 고집불통이라고 깎아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실상 「카터」는 고집불통이었던 과거의 덕을 지금 입고 있는 셈이다.
「마틴·루터·킹」의 아버지가 「어틀랜터」의 한 집회에서 「카터」 『인종적 순수성』발언을 용서하고 그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여 「카터」를 위기에서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은「킹」이 흑백 문제에 얽힌 「카터」의 과거 경력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땐 고향서 땅콩 장사>
「카터」가 해군에서 제대한 뒤 「조지아」주의 「플레인스」에서 땅콩 장사를 시작한 1954년 연방 대심원은 흑백 분리 교육이 위헌이라고 판결하여 남부가 발각 뒤집혔다. 사방에서 일어나고 『백인 시민 위원회』라는 것이 생겨 대법원 판결에 반대운동을 벌였다.
「플레인스」에서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백인은 「카터」한사람 뿐이었다. 회유와 위협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가입비 5「달러」가 없어서 그렇다면 그걸 대납해 주겠다고 어떤 백인이 말하자 「카터」는 나도 5「달러」는 있어. 하지만 그걸 내고 백인 시민위에 가입하느니 변소에 처넣겠네』라고 쏘아 붙였다. 덕택에 땅콩 경작자들은 「카터」와 거래를 끊었고 「카터」의 창고는 한참 동안 텅텅 비었었다.
「카터」는 「모럴리스트」라고 풍자될 정도로 정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연설하는 모습도 「잭슨」 「유들」 「험프리」에 비하면 특이하다. 그는 음성을 높이지 않고 나직하게 대화하듯이 연설을 한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카터」는 청중들을 잠재운다고 비꼰다.
그러나 「잭슨」이나 「험프리」의 부산한 연설을 듣다가 「카터」의 연설을 들으면 개울물에서 바다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카터」의 아버지는 구제 불능의 경지에 이른 흑백 분리주의자 있고, 어머니는 반대로 흑백 통합론자였다. 흑인문제를 놓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별인 빈번한 충돌에서 「카터」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지지한 것이 오늘의 정치 기반이 되었다. 직업이 간호원이었던 어머니는 1964년에 「존슨」의 「플레인스」지방 선거사무소장을 지냈고, 1966년에는 66세의 나이에 평화 봉사단에 참가하여 인도에서 2년간 간호원으로 봉사할 정도의 맹렬 여성이었다.

<백악관서 사는 게 소원>
「카터」의 부인 「로잘린」역시 선거 운동에는 이력이 붙은 여성이고 복지 문제에서는 「카터」의 주요 자문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집안 분위기가 「정치 지향적」이다. 「카터」는 주지사 회의에서 「록펠러」나 「리건」 같은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나도 저 정도는 된다』는 자신을 얻었다. 1972년에는 「험프리」 「잭슨」 「맥거번」 「머스키」가 「카터」를 찾아가서 지지를 호소했다. 그때 「카터」 자신은 한층 굳어졌다.
당시 「카터」는 전당대회에서 「잭슨」의 추대 연설을 했다.
「카터」는 지금까지 땅콩 장사로 75만「달러」 정도의 재산을 모은 것으로 추산된다. 그만해도 10대가 될 때까지 전깃불이 없는 판잣집에서 자란 시골 출신의 이 「도덕주의자」로서는 성공이다. 그러나 「카터」는 그를 방문한 소설가 「패트릭·앤더슨」에게 1961년에 신축한 자기 집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집이 우리가 결혼 후 이사한 열다섯번째 집입니다. 이제 살아보고 싶은 집이 하나 있읍니다. 거기서 살고 나서는 이 집에서 영주할 참이지요.』 「카터」가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그 집은 물론 백악관이다. 【워싱턴=김영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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