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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로부터의 선풍 포드 위협하는 리건 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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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워싱턴=김영희특파원】거의 무망하다고 느껴졌던 리건이 텍사스 주 예선에서 대승함으로써 포드 대통령 후보 지명경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텍사스 주에서의 결과가 앞으로 남부지방 예선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포드로서는 치명적인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남부 13주의 지지는 공화당후보가 되고자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적이다. 지명대회대의원 2천5백92명 중에서 이 지역이 차지하는 것이 6백6명. 그것은 지역별로는 가장 큰 무더기 표다. 포드의 텍사스 완패가 심각한 이유는 이런 간단한 산술 때문이다.
남부예선으로는 앨라배마·조지아·테네시·켄터키가 남아있다. 포드는 지금까지 플로리다에서 이기고 노드캐럴라이나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당했다.
1968년 선거에서 닉슨 당선의 큰 추진역은 소위 남부전략이라는 것이었다. ①흑백통합의 속도를 늦추고 ②대심원판사에 보수적인 인물을 지명할 것을 공약하고 ③한국·일본·홍콩 및 대만을 상대로 섬유분쟁을 일으킨 것이 남부전략의 중요 내용이었다. 그것으로 닉슨은 보수적인 민주당 표까지 긁어 모았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리건이 노드캐럴라이나 주와 텍사스 주에서 승리한 큰 배경은 포드·키신저의 안보정책에 대한 집중공격이라고 한다.
슐레진저 국방장관파면과 미국의 군사력이 소련에 뒤지고있다는 주장은 포드와 키신저의 정력적인 반론에도 불구하고 호소력이 있었다는 판정이다.
남부의 불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키신저 국무장관 파면 같은 조치가 있어야 된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포드의 보좌관들은 키신저를 해임하면 포드 진영 안에 마치 무슨 공포 분위기라도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우려가 있고 결과적으로 리건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여 반대한다.
포드 대통령은 지금까지 마야궤스 사전 때 취한 강경 조치와 연방정부의 지출억제 조치로 남부 전략을 삼아왔다. 거기에 대한 남부의 대꾸가 노드캐럴라이나와 텍사스에서의 포드의 패배다.
그러나 포드가 앞으로 남은 남부의 대부분의 예비선거에서 진다고 해도 지명까지 리건에게 뺏기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11월 선거다.
카터는 민주당의 경쟁자가 예상보다 일찍 탈락하는 바람에 벌써 11월 선거 태세로 들어가서 포드 공격을 시작했다.
포드는 카터의 화살을 받으면서도 리건을 상대로 하는 목전의 지명대책이 급하다.
이처럼 포드를 곤경에 처넣은 리건이란 어떤 인물인가? 그의 출신배경부터 살펴보자.
미국 작가 싱클레어·루이스가 1920년에 발표한 문제작 『메인·스트리트』는 지방 소도시 사람들의 보수적이고 답답하고 옹졸한 생활과 사고방식을 비판적으로 묘사하여 당시의 미국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자신이 출생한 미네소타의 속·센터를 모델로 소설을 쓴 루이스는 『메인·스트리트는 미국 어디에나 있는 다른 모든 소도시적 사고방식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메인·스트리트의 사람들은 공화당 이야말로 하느님과 침례교의 지상의 대리자이고, 사회주의자는 교수형에 처해야 하고, 연간 소득이 1만 달러를 넘는 자와 8천 달러 미만의 자는 모두 악인이라고 믿었다.
그때부터 메인·스트리트는 이 나라 보수주의의 대명사로 통한다.
로널드·리건이 출생한 일리노이의 탐피코, 그가 성장한 게일즈버그 몬마우드 및 닉슨은 바로 메인·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소도시들이다. 리건은 연방정부는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해야한고, 세금은 적을수록 좋고, 사회복지는 지방정부에 맡길 일익, 연방정부는 시민생활에 간섭하지 말고, 범죄는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지금 『리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루이스가 묘사한 메인·스트리트에서 떠든 소리 그대로다.
리건은 메인·스트리트의 사람들을 업고 그들의 영웅으로 포드에게 도전하고 있다.
리건은 지금은 보수적인 공화당의 투사지만 그는 시골의 인습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사회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동안 민주당 지지자였다. 그가 공화당원이 된 것은 오랜 수업시대와 편력시대를 거치고 나서였다. 그는 탐피코의 신발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2백50명의 학생밖에 안되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음주·흡연·춤을 금지하는 학칙개정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을 성공적으로 지도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그는 완고한 인습이 지배하는 사회의 이단자였다. 대학졸업 후 리건은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로 입신했다.
그는 야구 중계에 대해서 특히 발군이 실력을 발휘했다. 그가 37년 랄리우드의 워너·브러더즈 영화사와 주급 2백 달러(10만원)로 영화출연계약을 맺은 것도 시카고·컵스 야구단을 따라 캘리포니아에 갔을 때였다.
그는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1급 배우로 올라서지는 못하고 52년 사양길을 맞았다. 54년 텔리비젼으로 전환했다. 그러다가 64년까지 그는 센트럴·일렉트릭 회사와 계약을 맺어 전국에 있는 그 회사의 공장을 찾아다니면서 강연을 했다 거기서 리건의 대중 연설의 솜씨는 닦여졌다.
리건의 아버지는 뉴·딜 정책을 지지하는 민주당원이었고 리건 자신은 50년 닉슨이 캘리포니아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까지만 해도 민주당 후보를 지원했다. 그때 리건은 정치에 흥미를 느끼고 공화당으로 옮아갔다. 조반상 앞에서도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부인 제인·와이먼의 가출상태를 맞아 제2부인 내시·데이비드는 오히려 자기보다도 정치에 관심이 많은 여성으로 고른 인물이다.
66년 마침내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는 64년 골드워터의 대참패 이후 지도자를 잃고 있던 공화당 보수파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메인·스트리트에서 백악관이 있는 펜실베이니아 가까지의 길은 멀다. 리건의 도전이 성공할지는 아직 두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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