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사관학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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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지금부터 꼭 30년 전 1946년 5월 1일, 태릉의 옛 일본군 지원병 훈련소 자리에서는 기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80명의 장정들이 일본 군복을 입고 장화를 신고 푸른 띠를 두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 군대식 구령에 맞춰 이형근 삼령(소령) 앞에 정렬했다.
이들은 그 전달 말에 폐교된 군사영어학교 미수자와 전국의 국방경비대 9개 연대에서 선발된 사병들이었다.
이 삼령 옆에는 한 미군 소령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부교장 겸 생도대장의 자격으로 장창국 중위가, 그리고 또 그 옆에는 강문봉 중위 등 몇몇 교관들이 배열하고 있었다.
이 날이 바로 오늘의 육사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의 개교일인 것이다.
이날부터 태릉의 훈련장에서는 매일 진지한 훈련광경이 벌어지게 되었다. 보병전술·총검술 등은 일식, 군수교육 등은 미식의 뒤죽박죽 교육이었다.
교관들부터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장창국. 강문봉 두 중위가 미군의 「보병교범」을 미군 소령으로부터 배워가며 밤새 번역, 익혀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생도들에게 가르쳤다.
한마디로 당일치기 교육이었다. 그러나 생도들은 모두가 군사경력자들이었다.
또한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빚내자』는 마음에 불타 있었다. 어느 나라 사관학교나 초창기에는 우스운 일들이 많았다.
오늘날 세계 제일을 자랑하고 있는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도 처음 개교됐을 땐 10세의 사관생도가 있었는가 하면 일곱명의 아이 아버지도 있었다.
교수는 단 두 명. 그 중 한 명은 수학을, 또 한 명은 물리학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추가된 불인 교수는 「프랑스」어와 작도법을 가르쳤다. 한마디로 보병사관보다도 공병과 포병사관의 양성을 위한 교육이었다.
일제 때, 한국 민간인으로는 일본군대에서 가장 계급이 높았던 홍사익 중장의 회고에 따르면 초기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는 「프러시아」출신 장교가 고문으로 있었다. 그는 호령법을 통일시키는데 매우 애먹었던 모양이었다.
광복 후 우리 나라의 육사는 해방당시의 어수선한 속에서 자라야했다. 또한 단단한 틀이 잡히기도 전에 6·25를 겪어야 했다.
10기생은 졸업식을 반달 앞두고 전장에 나가야했다. 입교한 지 보름밖에 안된 2기생들은 실전으로 교육을 대신했다. 이들 중에는 생존자보다도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이 많다.
이제 육사는 8천여 명의 육군의 꽃을 낳았다. 대통령도 낳았다.
오늘도 태릉에서는 젊은 정예들의 당당한 보무로 대지가 흔들리고 있다. 그 속에서 자랑스런 국군의 앞날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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