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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제50화 외국유학시절(속)(8)순종 추모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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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2학년에 진급하여 학기초를 맞이한 1926년 4월25일, 순종황제께서 승하하셨다는 놀라운 비보가 전해왔다.
그렇잖아도 물설고 낮선 이국 땅에 와서, 그것도 우리를 식민지로 삼은 지배국에 와서 온갖 수모를 감수하며 어떡하든 이겨보겠다는 일념으로 풍습과언어의 장애를 극복하며 안간힘을 쓰는 우리유학생들은 조그만 계기만 생겨도 애국심이 끓어올랐다. 하물며 이러한 국상을 망하고서는 나라 잃은 망국민의 슬픔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비례하여 한층 침통한 분위기였다.
나는 이 국상을 당하여 예전에 고종황제가 승하하셨을 당시의 상황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11세 때였는데 고종황제께서는 식혜 한 그릇을 드셨는데 그것을 잡수시고 인사불성이 되셨다가 이내 승하하시고 마셨다고 어른들이 수군거리면서 조용조용히 말씀 하셨었다.
고종황제의 고난에 찬 말로는 비운의 국가 민족을 상징하듯 원통하고 참담한 것이였었다. 민족적 울분이 나이 들면서, 더우기 일본에 나가 있으면서 한층 고조되고 내 나라에 대한 애착심이 더욱 간절해가던 즈음에 순종 황제 송하 소식에 접하게 되자 나는 다시 한번 고종황제의 송하 사건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 식혜사건과 방블한 검은 음모라도 숨어있지 않나 하는 착각(?)이랄까 의구심이 랄까를 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민족적 시련과 아픔 속에서의 일본생활은 더 많은 인내와 강인과 과묵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이때 고종창제의 세 째 왕자이신 이은 전하는 벌써 11세 때에 이등평문에 의하여 일본유학이라는 미명아래 불모로 되어있었고 덕혜옹주는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동경에 왔었다. 옹주는 연배가 우려 또래여서 여자유학생 몇 사람이 함께 만난 일이 있었다. 날짜는 잊었지만 그분이 기거하시던 저택정원에서 가진 회합이었다.
화재가 한참 무르익어 갈 무렵 시종(일본인)이 와서『이제 들어가실 시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듣자 옹주는 만면에 꽃피우던 웃음을 거두고 표정이 굳어져서 돌아섰는데 우리는 그 때 서로 붙들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눌렀다. 아연하고 가슴이 막히는 애처로움과, 씁쓸한 감정을 안은 채 우리 몇 사람은 기숙사로 돌아 왔었다.
순종황제 서거에 임하여 동경에 있는 유학생들은 주최자인 학흥회 (여학생회)와 신간회(남녀 함께)의 주선으로 추모식을 가졌다.
「와세다」대학 강당에서 추모식을 열렸는데 조혜영씨 (당시 재일조선학생회 회장)가 주로 활약을 하신 걸로 안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흰옷 차림이어서 장내는 백색이 뒤덮여 있었다. 순종의 승하인즉 곧 나라가 온전히 일본의 손아귀로 드는 느낌이어서 슬픔은 배가하였고 장내는 소리 없는 오열로 넘치고있었다.
순종황제께서 서거하실 무렵에는 일본에서 일본 황태자의 비로 내정 되 있다 는 이본가 영애를 이은 전하와 혼인시키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 억지 정략결혼에 대하여 순종황제께서는 『왕자에겐 이미 약혼한 민소저가 있다』고 항의하였지만 일본측에서는 『일본과 한국이 명실공히 형제 국이 되기 위하여서는 이 결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떼를 썼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혼인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즈음에 순종황제께서 승하하셨으니 일이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측에서는 순종황제의 서거를 숨기고 결혼식을 강행하려 하였다. 결혼식이 끝난 다음에 황체의 승하 사실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한국인들이 강력히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이 사실이 은연중에 널리 퍼져 있어서 더 숨길수가 없었기 때문에 장례식이 먼저 거행되게 되었다.
이 사실 한가지만 미루어서도 일븐의 한국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잔인 부도 하였으며 야만적이었나를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 한국의 민소저는 후에 중국으로 보내어졌고 해방 후 근년에야 이미 오래 전에 잊혀졌던 그의 존재가 확인되어 또 한번 세인을 놀라게 한바 있는 걸로 안다. 왕세자의 약혼자였다는 것만으로 갖은 풍상을 겪은 그분이 그때까지도 처녀의 몸이었다니 더욱 듣기 애처로운 이야기였다.
뿐이랴! 일본의 황후가 될 뻔하였던 이방자 여사께서 기우는 나라의 왕세자와 국제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그 가슴에 맺힌 한이 또한 지극하겠기에 이런 비인도적·비인간적 처사를 감히 저지른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하여 새삼 비분강개를 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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