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금 모으기, 마음 모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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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 해 겨울은 따뜻했다.

손에 손에 금붙이를 꺼내든 사람들이 직장에서, 은행에서, 방송국에서 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넉넉한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가 아끼던 유일한 금반지를 뽑아들고 나온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자발적이었고 표정은 한결같이 진지했다. 이렇게 해서 두 달간 모인 금이 무려 226t, 이를 수출해 얻은 외화가 21억2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이 39억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國難)'인 IMF 외환위기를 유례없이 최단 기간에 극복할 수 있었던 동인이 바로 이러한 정신에 있었다. 국민의 마음이 모였을 때 금이 모였고, 금을 모으면서 마음을 모았던 것이다.

최근 독도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측의 가당치도 않은 억지주장으로 조야(朝野)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하면서 국민의 마음이 모처럼 한데 모였다. 이를 잘 살려나간다면 새로운 국민 단합과 국가 발전을 향한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격에 맞는 당국자가 한두 차례 의연하면서도 단호하게 일본 측의 부당성을 질타하는 한편 많은 국민이 독도를 방문하는 등 무언의 행동으로 우리의 결의를 보여주면 족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외교의 최후 보루이자 마지막 대카드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일본에 직격탄을 날렸다. 많은 국민은 오랜만에 후련했고 일본도 적잖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뒤미처 과연 그것이 외교적으로 온당하면서도 국익을 위해 가장 실효성 있는 방법인지 식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우려와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역풍으로 아쉽게도 모처럼의 계기가 별 소득없이 끝나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고 기회는 쉽게 다시 오지 않는다.

또 최근 행정수도 분할 문제로 야기된 경향 간의 새로운 지역갈등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국토의 균형발전은 긴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지방의 것을 무 자르듯 뭉텅 잘라 다른 지방에 붙여주는 방법이라면 이는 너무나 산술적이다. 얻는 측의 기대뿐 아니라 잃는 측의 상실감에 대한 고민도 모자랐다. 민원인의 불편은 물론 수많은 공무원의 가족 이산과 주말 장거리 행렬의 고달픔 같은 것도 가볍게만 여길 일이 아니다. 이 또한 국민의 마음을 가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富)의 분배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고르게 잘 사는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출발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라는 인류 보편의 인식에서가 아니라 가진 자의 부는 가난한 사람을 착취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차원이라면 이는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전자가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화합의 표현이라면 후자는 그 마음을 분열시키는 투쟁의 표현일 뿐이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것을 나누어 가지려는 동기유발과 공감이 정책의 근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사람에 대한 의도적인 편가르기다. 여기에는 위정자뿐만 아니라 일부 시민단체나 언론도 가세한다. 너는 친일했던 사람의 후손이니까, 너는 과거 정권에 봉사했거나 그런 사람의 자녀니까, 너는 오랫동안 떵떵거리며 살았으니까, 너는 수십 년 전에 농촌에 땅을 산 일이 있으니까, 너는 보수꼴통이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동참의 대열에서 추방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세상에 한 점 허물없이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려는 군중에게 예수께서 말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이 말에 사람들은 하나 둘 말없이 흩어져 갔다. 물론 큰 허물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반성하고 근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은 허물, 너무 오래되어 잊혀도 좋을 허물은 서로 감싸주는 훈훈한 모습도 보고 싶다. 이 또한 국민의 마음을 모으는 길이 되기 때문이다.

무릇 훌륭한 정치란 화해와 통합의 정치다. 분열과 갈등의 정치는 그 명분 여하를 막론하고 바람직한 정치가 못 된다. 더구나 그것이 만의 하나 어떤 숨겨진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에 대해서만 생각하지만 현명한 정치가는 다음 시대의 일을 생각한다."

대통령도 정부도 국민도 다시 한번 금 모으기 정신으로 되돌아가 흩어진 마음 모으기에 발벗고 나섰으면 좋겠다.

김경한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