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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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주은래의 장례식과 함께 세계는 그 후계자 문제에 더 관심이 크다. 지금 추측되는 주은래의 수상직「바통」은 등소평이 이어 받으리라는 것이다. 등소평은 단구에 단발을 한, 차돌 같은 인상을 주는 인물.
지난해 12월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온「키신저」는 그에 대한 인물평을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주 수상과는 달리 관료적인 냄새가 짙은 사람이다. 직설적이고 더 실제적인, 비범한 지성파이다.』 근착「타임」지도 『모택동과 주의 관계에서 엿보이던 「정신적인 향기」는 결핍된 인물』이라는 평을 하고 있다. 비정한 이론가의 면모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등소평의 이름은 10년 가까이 중공은 물론 세계에서도 잊혀져가고 있었다. 1966년 이른바 「문화혁명」에 의해 그는 유소기의 골수분자로 그와 함께 실각되었다. 하지만 유소기처럼 격렬한 비판은 받지는 않았었으며, 「인민일보」도 그의 이름을 지적한 적은 없었다. 당시 당의 총 비서였던 등은 『노선상의 잘못을 저지른 것은 유소기와 나의 잘못이었다』고 자기비판을 했었다. 그러나 끝내 구명의 특사는 내러지지 않고 말았다.
이런 일화가 있다. 60연대의 「대약진운동」무렵, 그는 농업 정책과 경제개발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모택동은 당의 권력 행사에 있어서 그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등은 『갈고리를 쓰든, 망치를 쓰든 상관없다. 쥐를 잡을 때, 고양이의 빛깔이 검든 희든 상관없지 않은가』 라는 입장이었다.
바로 이런 주장은 모에 대한 도전으로, 그 후엔 수정주의자로 낙인찍히는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1974년 정월 그는 돌연 복권이 되면서 부수상 겸 정치국원으로 지명 받았다. 이미 주은래는 돌이킬 수 없는 병세에 있었으며, 주의「템포」와 정치적 유산을 무리 없이 이어받을 사람으로는 무난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던 것 같다.
바로 그 해 등이 중공의「유엔」대표단을 이끌고 「뉴요크」에 나타난 것은, 말하자면 주의 대항자로서 국제적인 공인을 받으려는 일종의 정치 행렬이었다.
등은 19세의 소년시절에 「프랑스」유학을 했던 야심가였다. 그는 스스로 빈농의 아들이라고 말하지만, 사천의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20대 초입에 벌써 중국 공산당에 가담, 귀로엔「모스크바」를 들렀었다.
1927년 25세의 등은 「게릴라」대장으로 국민당과 싸우기도 했다. 모택동과는 「장정행렬」의 동참자.
소련과의 관계는 역시 긴장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복권」이라는 병력은 그로 하여금 노선선택의 여지를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등의 천하도 역시 별로 새로운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추측은 여기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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