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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송상일 「한국적인 것」의 순환적 이해-문학에 있어서의 한 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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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 보편화에 대한 반성>
보편화에 대한 반성은 보편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한다. 문화의 보편성을 거부함으로써 문화적. 상호공감을 포기하고, 따라서 스스로 절찬해 마지않는 특정한 문화자체를 제한하게 된다는 사실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갈다.
그러나 보편성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의 개별성을 무시함으로써 보편화하려는 음모도 배척되어야 한다. 개별성을 추방하는 보편화라는 것은 문학의 「버라이어티」를 부정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문화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김현이 「새것 콤플렉스」라는 기발한 신어를 만들어 지적했던 이와 같은 보편화의 작업은 의외로 한국(신)문학사에 상당한 세력으로 만연되어 있었다.
『우리는 선조도 없는 사람』그래서 이광수가 「신종족」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 「들어라. 새시대가 왔다』고 김억이 열광했을 때(「폐허」창간호 편집 후기),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 있어도 마음놓고 지낼 작정이냐』고 이상이 역정을 냈을 때(「오감도」작자의 말), 이들은 모두 그러한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신경질환은 50년대를 고비로 절정을 이뤄, 서구와 한국 문학을 주종관계로 설정하여 우리 것에 대한 평가절하가 유행하게 되는데 그 후유증은 백낙청으로 하여금『우리가 부모의 살과 피를 받았듯이 이어받은 문학전통이 태무하다』(「창작과 비평」창간사) 는 어휘마저도 이광수의 「신종족」과 흡사한 발언을 하게 만든다(후일 그는 그런 자신의 발언이「환각」이었다고 수정하고 있다). 일단 「한국적인 것」이 부정되고 나「이즘」의 난립이 시작된다. 그것은 문학의 「바리새이즘」의 출현이었다. 종교적「바리새이즘」이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계율의 정해진 조목으로 재단했듯이 문학의 「바리새이즘」은 고정된 용어를 가지고 모든 문학을 고착시키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백철이 제시했던 「근대화-서구화」의 공식은 아마 그 모범적인「케이스」일 것이다(전집 제1권 P·207).
이러한 방법의「바리새이즘」은 오랫동안 한국인을 지배해 왔을「아나크로니즘」(시대 착오)에 대한 공연하지 만은 않은 불안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나 「아나크로니즘」에 대한 피해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아나크로니즘」의 어둠 속을 헤매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깨닫기 시작했다.
김현은 두 가지 방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었다. 『한국 문학의 양식화』(「창작과 비평」통권 6호)이래 그가 수행해 온 것은 한국문학을 통시적인 면에서 불교적·유교적·기독교적 이념형으로 구분하고 한국인의 시대적 태도를 이른바「문화의 고고학」으로 살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 문학을 일관하는 성격보다는 시대적 편차 쪽에 역점을 둠으로 하여(비록 선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고는 있으나) 『기독교적 이원론이 한국문학에 뿌리 잡기를 바란다』는 위태로운 처방을 내놓았다. 이념형이란 시대마다 특정한 신념이 우월하게 작용한다는 가설을 근거로 한 사회학의 한 이론이지만 상정된 신념과 배반되는 제 신념에 대해서는 「프로크러스티즈(고대 「그리스」의 강도의 침대」로써 행사될 수 있다는 우려를 놓쳐 버린 때문인 것이다.
한편 문화 사이의 영향관계를 굴절현상으로 이해하고 서구적인 것의 수용형식에서 「한국적인 것」의 구조를 발견하려는 보다 기대해 볼만한 시도가 있었다. 그는 l920년대의 상징주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외국사조가 한국 문학사에 들어와서 일으킨 변무의 필연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여성주의의 승리」현대문학 통권178호). 물론 『한국시인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한국의 정서를 담았기 때문에 한국 시에는 서구적 낭만주의가 없었다』(윤재근, 「문화비평」1권4호)는 긍정적 의식은 대단한 의의와 설득력을 가지는 것으로 서구적인 것과 우리의 것을 주종의 관계로 보았던 폐습에 대한 대담한 혁신이었다. 그러나 수용의 형식을 밝힘으로써「한국적인 것」을 밝히려는 시도는 우리의 것이 자기 동일성을 가지는 것으로 취급하려는 처사는 아닐 것이다.
하나의 전통은 아무리 발달된 비교 연구로써도 밝혀지지 않는 두터움(자체가 자체 안에 있음) 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뿐 아니라 이 경우에는 저들의 것이 밝혀짐으로써만 우리의 것을 조명할 수 있게 되어 우리의 것의 영역을 그만큼 제한하여 보아야 한다는 약점을 지니게 된다.

<4, 순환적 이해의 방법>
단적으로, 단순하고 명약관화한 「한국적인 것」의 원형이란 영구적인 가설적 상태에 불과하다(인식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물자체 ding an sich」와 같은 것이다). 이처럼 원형에의 접근이 불가능하다면 의외의 반성에서 진입로를 찾아 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서두에서 우리가 흔히 어떤 대상을 지적하여「한국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후퇴하여 그 원형을 보려면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었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한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바로 그 기이한 사실에서 시작해 볼 수는 없을 것인가.
만일 우리가 「한국적인 것」을 거의 완전하게 기술해 낸다면 그것은 수직적으로, 또 수평적으로 무한히 분화되고, 모순되고 혼돈된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혼돈에 크게 구애됨이 없이 실제로 「한국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전체적으로 「한국적인 것」의 실제를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우리가 「메밀꽃 필 무렵」을「한국적」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이미 이해하고 있는 「한국적인 것」을 그 작품에서 발견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의 선취는 「전리해 vorversta-ndnis」라는 「하이데커」의 용어로 더욱 명료하게 파악된다.
무엇을 새로 만났을 때 우리는「언제나 이미」이해하고 있는 것에 의하여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는 이 근원적 원리는 『이해한다는 것은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것과 동 근원적』이라는 「하이데커」의 명제일 뿐 아니라 현대 인식론의 공통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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