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등상 5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깔딱고개위에 올라서 턱에 차오른 가쁜 숨을 몰아쉬기가 바쁘게 덮어누르듯 위압해오는 거대한 바위봉우리. 하늘을 찌를듯 불거져 오른 화강암의 암골이 너무도 웅장하고 의연하다.
인수봉(해발803m)은 봉우리전체가 단 하나의 바윗덩어리요, 사면이 깎아지른 급경사를 이뤘으니 그 형상이 일견 괴이하기 짝이없어 조물주의 장난치고 미소를 금치 못하게하며 기막힌 자연의 조화가 아닐수 없다.
인수봉은 백운대·만경대(해발800m)와 함께 소위 말하는 삼각산을 이루는 봉우리며 개성방면에서 이곳을 보면 마치 세개의 두목이 병립해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어 벌정 또는 삼봉이라고도 불리었다.
신증동국여지승멱(성종왕명편)을 보면 삼각산을 화산이라고도 불렀으며 신라시대에는 백운대를 부아악이라고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백운대가 어린애모양의 인수봉을 업고있는 현상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결국 인수봉은 백운회의 자로인 셈이다.
그러나 오히려 백운대에 비하면 인수봉은 난공불낙의 천연 요새.
『댕댕이 휘어잡고 상상봉 올라가니 조용한 암자한채 구름속에 누웠구나 눈앞에 보이는 땅이 내것이 될 양이면 초월강남 먼먼덴들 어이 아니 안기리』 일찌기 명장 이태조까지 백운대를 정복, 이런 『등백운봉』이라는 시를 읊었다고 하지만 인수봉에는 왕조가 끝날때까지 사람이 올라갔다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서양사람들이 밧줄을 타 인수봉에 오르는 것을 본것은 29년 고보1학년시절 백운대를 네번째 갔을 때였다. 그후 바로 인수봉에는 감히 도전치 못하고 백운대 직벽에서 외종형(이춘봉씨)을「리더」로 그의 친구 또 사촌동생등 일행5명이 예행훈련을 했다.
우리가 가진 장비라고는 내가 소년단에 있으면서 구입한「로프」로서 빨랫줄같이 약하고 가느다란 것이었다.
암벽등반때의 안전확보법같은 지식은 전무. 겁없이 먼저 기어오른 선두의 외종형 이씨가「빨랫줄」을 늘어 뜨려주면 나머지 일행이 그걸 붙잡고 뒤따랐다. 손발은 물론 배와 가슴이 헤어지도록 찰싹 달라붙어 악전고투를 한끝에 결국 백운대 정상까지 오르는데 성공했다. 지 금 생각하면 위험천만의 모험이었다.
그런데 바위굴방의 주인 이해문노인이 백운대에서 밧줄을 가지고 바위벼랑을 오른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멋모르고 한짓이 백운대 암벽초등반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하반부 암벽정면을 가로질러 오르는 「코스」는 훨씬 후이므로 기록상으로 백운대 정면벽 초등반은 34년5월이 된다.
암벽등반의 매력을 경험한 우리는 다음해인 30년 봄 인수봉을 등정하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인수봉에는 누가 맨 먼저 올라갔을까.
이해문 노인에 따르면 그가 이곳에 처음 왔을때가 24년 봄이었는데 인수봉의 정상에 이미 사람이 쌓아올린 돌탑을 보았다고 했다. 이 노인과 우이동 고노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도선사에서 수도하던 젊은 스님들이 신앙심에서 인수봉의 정상에 올라가 이 돌탑을 쌓은 것으로 추측되었다.
이 노인과 우리는 그 스님들이 어떻게 저 높은 곳을 올라갔을까하고 제각기 기상천외의 추리를 펴다가 맨몸으로는 북쪽능선을 타고 오를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적 등산인 암벽등반으로 인수봉을 첫 등정한 사람은 25년봄 원한경박사(연세대를 설립한 「언더우드」박사)인데 (서양인 일행 몇명이 있었다고 함) 원박사는 그후 계속해서 여러 서양인과 2,3인의 한국인을 대동, 등반을 즐겼다.
일본인으로선 반산달웅이라는 사람과 그 친구일행이 29년 가을에 처음으로 오른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만이 인수봉을 정복한것은 30년 봄이라고 하는데-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음-결국 인수봉암벽등반은 우리일행이 한국인으로서 두번째가 되는 모양이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