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 세력 대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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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학생운동의 방법론을 놓고도 맞섰다. 그는 『학생연맹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한민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야하고 가급적이면 당적을 갖는편이 좋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학생연맹은 여하한 정당에도 이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사사건건 이와같이 주장을 달리하면서도 학원내외의 적구소탕, 신탁통치반대의 양대당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단결했다. 전국학련의 분쟁은 1947년11월에 신탁통치를 완전히 분쇄하고 5·10총선거를 추진하여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게 되고서 부터 표면화했다.
1948년5월10일 역사적인 총선거를 맞아 이군은 나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치고, 몇몇 추종자들을 인솔하고 전주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국회당원에 입후보했다. 이군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자 그가 재적하던 고려대학교에서 그를 제적하여 버렸다.
총선거의 결과 이군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전국학련의 여러 간부학생들을 총동원하여 복교운동을 하였으나 모두 다 실패하였다. 나는 그때 현상윤총장님의 귀염을 받았었으므로 그 선생님을 맡아서 떼를 썼다. 지금은 이곳에 안계신 현선생님이 그때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나의 귀에 쟁쟁하다. 『결론부터 말하지요, 절대로 안됩니다. 이군은 정치가이지 어디 학생인가요』. 우리들은 인촌 김생수선생으로부터 이군을 복교시켜달라는 서찰까지 받아갔었지만 종내 현총장님은 그의 소신을 굽히시지 않으셨다.
이렇게하여 이군은 복교에 실패하게되니 전국학련은 위원장문제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이군에게 권고했다. 『이형은 학생이 아니므로 위원장이 될 수 없으니 전국학련 규약을 개정하여 참여(참여)라는 제도를 신설하고 실질적인 권한은 참여가 가질 수 있게 하여서 전국학련의 혼란을 방지하자.』
그러나 이군은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며-.
『전국학련은 내가 만들었는데 어떤 놈이 위원장 노릇을 하겠단 말이냐?』 하며 폭행까지 하려했다.
이리하여 전국학련 대의원대회에서 대회의 의장인 나와 안승렴 둘이 의장을 하고 우리와동조하던 많은 맹원이 모두 퇴장을 한뒤에, 이군이 복교되었다는것을 다수결로 결정하고 위원장이 다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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