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카렌·퀸랜」, 21세. 명랑하고 극히 평범한 미국의 한 처녀였다. 지난 4월14일 밤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기 전 약방에서 흔히 파는 진정제를 먹고, 그리고 「진·토닉」 몇 잔을 마셨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쓰러졌다. 그런지 반년. 그녀는 아직도 혼수상태에 빠져있다.
54kg이던 체중이 30kg으로 줄어들고, 목을 절개하여 「파이프」로 영양액을 보급하고, 인공호흡장치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나가고 있다.
주치의는 그의 생명이 『만성적인 식물의 상태』라 표현하고, 앞으로 뇌의 장해는 회복불능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동안 「퀸랜」의 부모는 5천5백만원을 썼다. 앞으로도 매일 22만여원씩이나 되는 의료비의 일부를 부담해야 한다.
오랜 간병에 지친 부모는 교구의 신부와도 의논한 끝에 「퀸랜」의 생명을 부지해주고 있는 인공호흡장치를 떼어 안락사를 시켜달라고 병원에 애원했다.
병원측이 이를 거부하자 부모는 「뉴저지」주 최고법원에 제소했다. 그러나 이 법원은 10일 『인간에게는 죽을 권리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보다 앞서 같은 주에서 한 백혈병 환자가 자기는 죽고싶다면서 진료를 거부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주 최고법원은 지난달 10월26일 죽을 권리가 없다는 판결을 내린 참이었다.
그러나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은 이제부터인 것 같다.
「식물인간」의 비참한 삶보다도 「우아한 죽음」이 훨씬 인간을 아끼는 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안락사 찬성론의 골자이다.
「노벨」의학상을 받았던 「오스트레일리아」의 「바니트」박사는 『식물인간으로서의 치료를 거부한다』는 유서를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닌다 한다. 그도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퀸랜」의 부모쪽 변호사는 또 「종교의 자유의 보장」이라는 비 헌법수정 제1조를 내세웠었다. 이승의 목숨은 저승까지 계속되는 영원한 생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불치의 병에 걸린 「퀸랜」에게 안락사를 허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락사를 위해서는 인공호흡장치를 뗀 다음에도 「퀸랜」이 완전히 죽기까지 12시간이나 걸린다.
더욱이 거의 기적이나 바라보는 일 같기는 하지만, 「퀸랜」이 회복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살인이나 다름없는 안락사를 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 병원 쪽의 이유였다.
여기 대해 「로마」교황청은 이미 『인간에게 죽을 권리는 없다. 그러나 살 권리는 있다』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만약에 「퀸랜」이 입을 열 수 있다면 이번 「결석재판」에 대해서 뭐라 말할 것인가. 부모의 말대로 「우아한 죽음」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살 권리」를 주장할 것인지.
과연 사람이 산다는 것이 뭣인지, 사람의 목숨이란 과연 무엇인지, 한 사람의 목숨이 과연 뭣보다도 더 중히 여겨지고 있는지, 잠들고있는 「퀸랜」은 온 세계에 끔찍한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