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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대맛 라이벌 (7) 곱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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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 정치권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江南通新 독자가 뽑은 곱창 맛집 1,2위는 이 말에 딱 들어맞습니다. 양·대창 전문점 오발탄과 연타발의 두 대표는 14년 전 함께 가게를 낸 사이입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갈라섰습니다. 동업자에서 라이벌이 된 거죠. 출발점이 같아서인지 오발탄과 연타발은 메뉴는 물론 맛도 비슷합니다. 깔끔한 인테리어와 좋은 품질로 젊은 여성과 가족 단위 손님에게 인기있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오발탄은 연기가 잘 빨려올라가도록 연통을 좁게 설계해 곱창집 이미지를 확 바꿨다. 곱창집이라고 꼭 연기가 자욱하진 않다고 말이다. 석쇠도 열전도율이 좋은 구리석쇠만 고집한다.

1위 삼성동 오발탄
"곱창 싫어하던 나를 신세계로 이끈 것은"

“대학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하면서 사진기자를 꿈꿨어요. 그런데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내 길은 따로 있다는 걸 깨달았죠.”

 이헌룡(52) 오발탄 대표는 그 아르바이트를 인생의 첫 터닝 포인트로 꼽았다. 그 경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오발탄은 없었을 거라면서.

 “단순히 커피 파는 일이었는데 여러 사람을 만나고 좋은 공간을 제공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막연히 언젠가 음식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일하던 카페에선 한 잔에 2500~3000원인 꽤 비싼 사이폰커피를 팔았는데도 손님이 많은 거예요. 아이템만 좋으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사이폰(Siphone)커피는 쉽게 말해 삼투압 작용을 활용해 추출한 커피로, 1970~80년대 국내에 들어왔다. 테이블에서 직접 알코올램프로 물을 끓이는 신기한 모습 때문에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평범한 커피를 파는 카페였다면 장사하겠다는 꿈을 안 꾸었을 수 있죠. 인생엔 이런 전환점이 몇 번 있어요. 제대 후 사기당한 경험도 그중 하나죠. 그때 카페하려고 자리 알아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 부동산업자가 ‘그런 건 돈이 안 된다’며 끌고 어딜 가는 거예요. 198㎡(약60평) 정도 되는 당구장이었는데 사람이 꽉 차 있었죠. 돈을 엄청 버는 것 같았어요.”

 곧바로 그 당구장을 인수했다. 학생 때라 사업자금이 없어 가족의 도움까지 받았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꽉 차 있던 손님은 전부 그 부동산업자가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 가장 먼 당구장이더라고요. 쉽게 말해 학교 근처 당구장이 200원 받으면 50원 해도 올까 말까한. 1년 만에 망했죠.”

 비록 망하긴 했지만 이 경험을 통해 사업은 때가 있고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사회 경험을 충분히 쌓기 전엔 절대 사업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대신 외식업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 졸업 후 한 식당 관련 월간지에 입사해 기자로 6년을 일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유명하다는 식당은 모두 가봤다. 이를 토대로 『전국맛집 777선』이란 책도 냈다.

 “그 시기가 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습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수많은 식당을 봤죠. 잘나간대서 취재했는데 다음 해 찾아가보면 망해나간 집도 숱하게 봤어요. 그런 걸 보면서 맛도 맛이지만 경영자 마인드에 대해 많이 생각했죠. 식당이 좀 잘되면 주인이 가게 밖으로 돌기 마련이더라고요. 가게 관리도 안일해지고.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해요.”

1 이천 식자재공장. 2 양·대창은 온도에 민감해 늘 얼음물로 손질한다. 손질한 재료는 ‘비법소스’로 숙성시킨다. 3 이헌룡 대표.

 이 대표는 94년 회사를 나와 논현동에 132㎡(약 40평) 정도의 작은 돼지고기집을 열었다. 장사는 잘 됐지만 크게 성장하지 않는 등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지인이 소고기집을 운영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집인데, 장사가 잘 안돼 대신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거였다. 661(200평) 넘는 대형식당에 한 달 가게 임대료만 1000만원이었다. 당시 이 대표가 가진 돈은 딱 1000만원뿐이었다. 두려움이 컸지만 이 대표는 기회라고 생각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현장에 가보니 상권이 소고기 장사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하루 만에 간판을 돼지고기집으로 바꿔 달았다.

 “딱 봐도 소고기는 안 팔릴 곳이었는데 주인 욕심에 억지로 장사를 하고 있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간판을 바꾸고 나니까 6개월 만에 성공궤도에 올랐어요. 나중엔 손님이 너무 많아서 건물 밖 주차장 대지에 테이블 50개를 추가로 놓기도 했죠.”

 사업 성공을 발판으로 그는 다른 사업을 연이어 했다. 칼국수전문점과 바비큐전문점이다. 그러다 2000년 양·대창 전문점 오발탄을 시작했다. 현재 연타발 대표인 이명호 대표와 함께였다.

 “이명호 대표는 당시 일산에서 큰 고기집을 하다가 실패한 상태였어요. 전부터 외식업에 종사하는 사람 8명이 모여 만든 모임에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어요. 둘이 같이 양·대창집을 찾아다니며 맛을 연구하고 사업 구상을 했죠. 부산에서 유명한 오막집, 강북의 양미옥, 강남 터줏대감 곰바위 등 참 많이도 갔어요. 그 중에서 오막집은 잊을 수가 없어요. 원래 내장 음식을 별로 안 좋아했는데 거기서 양·대창을 먹어보곤 새로운 세계를 만났죠. 그게 아직까지 내 인생의 마지막 전환점이에요.”

 두 사람은 구이 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당시 연기를 아래로 빼는 방식에서 연통을 달아 위로 빼는 상향식 방법을 도입했다. 직화구이는 연기가 빨려 올라가면서 음식을 한 번 감싸줘야 내장 특유의 잡내를 없애고 숯향을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테리어도 최대한 깔끔하게 했다. 이후 손님이 몰려들었다. 2002년 송파점에 이어 2003년 서초점까지 매장을 3개로 늘렸다. 그런데 2004년 광우병 파동이 터졌다(※2001년과 2004년에도 2008년과 비슷한 광우병 논란이 있었다).

 “매장별 하루 매출이 1000만원 정도였는데 광우병 이후 100만원으로 뚝 떨어졌어요. 속된 말로 소고기는 양잿물 먹는 거와 같다는 말까지 돌 때였으니까요. 장사가 안 됐지만 전 좀 다르게 생각했어요. 한국 사람이 평생 소고기를 안 먹을 건 아니잖아요. 언젠간 수그러들 거로 생각했죠. 그래서 그 해 삼성점을 또 열었어요. 그것도 200석이 넘는 2층 규모로. 다들 미쳤다고 했죠.”

 하지만 이 대표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광우병 이야기는 점차 사라졌고 유동인구가 많은 삼성동 오발탄엔 고객이 폭발적으로 몰렸다. 부산·울산 등 전국을 넘어 중국 등 해외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됐다. 오발탄은 모든 지점이 직영이라 맛이 거의 비슷한데도 사람들이 삼성점을 유독 선호하는 건 10년 전 처음 먹어본 지점이기 때문이라고 이 대표는 생각한다.

 2006년 이명호 대표가 독립하면서 두 사람은 경쟁자가 됐지만 지금도 가끔 만나 소주 한 잔 기울인다.

 “한때는 서로 섭섭한 마음에 많이 서먹했어요. 그래도 생각해 보면 오발탄이 이렇게 성장한 건 이명호 대표 힘이 컸죠. 난 당시 다른 가게도 많아서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썼거든요. 실무적인 일을 그 사람이 많이 했어요.”

 두 사람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둘 다 양·대창 신흥강호로 인정받고 있다.

 “앞으론 매장 규모를 좀 줄이고 더 고급화할 계획입니다. 너무 큰 매장은 이제 시대에 안 맞는다고 생각해요.”

1 연타발 삼성점. 2 정육전문가가 고기를 손질해주는 정육코너. 3 이명호 대표가 양을 찢는 모습. 신선한 양은 섬유질이 풍부해 닭고기처럼 실모양으로 길게 찢어진다
연타발은 기본 소스에 청양고추를 넣어 곱창의 느끼함을 잡았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위 삼성동 연타발
'초짜' 곱창 장수는 왜 마장동에서 무릎을 꿇었나

칠전팔기(七顚八起). 숱한 실패에도 굽히지 않고 노력한다는 말이다. 자수성가한 여느 사업가처럼 양·대창 전문점 연타발의 이명호(52) 대표도 이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외식업에 뛰어든 지 올해로 25년이 됐다는 그의 인생은 굴곡이 참 많았다.

 “전기학을 전공해 원래 자동차 정비 사업을 한 5년 했어요. 근데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처가집에서 하던 돼지고기 식당을 인수하게 됐죠. 처음엔 아침부터 새벽까지 가게에 매여 있어야 하는 게 그렇게 싫었어요. 못 하겠다고 식탁을 엎고 나오기도 했어요.”

 그러다 이 대표가 장사에 재미를 느낀 건 6개월 뒤다. 노력하는 만큼 돈이 벌린다는 걸 깨달으면서다. 한창 바쁠 땐 설거지를 미처 다 못해 문 잠그고 설거지를 끝낸 다음 다시 문을 열어 장사를 할 정도였다. 손님이 많아지자 경제적 여유가 생겼지만 동시에 욕심도 더 생겼다.

 그는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른 식당도 들여다보니 그냥 돼지고기 집보단 번듯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큰 가든형 가게를 갖고 싶단 욕심이 났다”며 “어릴 때라 그렇게 해야 내 품격이 올라 가는 걸로 착각했다”고 말했다.

 3년 뒤, 그러니까 32살 되던 1994년에 꽤 많은 돈을 대출까지 받아 일산에 큰 소고기집을 냈다. 등심·떡갈비·샤브샤브 등 야심차게 다양한 메뉴를 내놓았다. 그런데 1998년 뜻하지 않은 외환위기가 닥쳐 그의 발목을 잡았다. 자본력이 약했던 이 대표는 버티지 못하고 3년 6개월 만에 가게를 다른 사람에게 헐값에 넘겼다.

 “알거지가 됐죠. 빚도 엄청났어요. 그렇다고 놀 수는 없고 뭔가는 해야 해서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는데 근처 예식장이 비어 있더라고요. 무작정 예식장 주인을 찾아가서 내가 여기를 음식점으로 살려볼 테니 투자해달라고 설득했죠. 한달을 쫓아다녔어요.”

 정성에 감동했는지 예식장 주인은 5억원을 투자했고, 그렇게 음식점을 냈다. 인근 사무실은 물론이고 주변 학교 학부모 모임까지 직접 찾아가 가게를 홍보할 만큼 열심히 했다. 장사도 잘 됐다. 하지만 이번엔 장사가 잘 되는 게 문제였다. 6개월 지나 예식장 주인이 식당을 직접 운영하겠다고 나서면서 다시 빈털털이가 됐다고 한다.

 “더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서울 처가집 지하방으로 왔어요. 이사할 돈도 없을 정도로 비참했어요. 전에 알던 거래처 사장이 준 30만원 중 20만원으로 이사 비용을 내고, 나머지 10만원은 전철표를 샀을 정도에요.”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이번에는 지인과 함께 고추장삼겹살집을 열었다. ‘열심’은 늘 이 대표를 따라다니는 말이다. 직화구이집 특성상 화로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직접 화로를 제작할 만큼 이번에도 정말 열심히 했다. 하지만 이번엔 동업자와 뜻이 맞지 않아 또 다시 6개월만에 그만둬야 했다. 그 후 이헌룡 오발탄 대표와 손을 잡았다.

 “당시 이헌룡 대표는 일산에서 장사를 했는데 내가 하던 고추장삼겹살집에 자주 놀러왔었어요. 그 친구도 화로에 관심이 많아서 끝나고 같이 기름을 먹여서 닦곤 했죠. 역삼동에 165m²(약 50평) 규모의 가건물같은 허름한 가게를 얻었는데 돈이 많지 않아 제가 직접 황토로 벽을 바르고 대나무를 잘라 전선을 넣어 조명을 달았죠.”

 그렇게 가게를 마련하곤 두 사람은 곱창 중에서도 고급인 양·대창을 팔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2000년 두 사람이 동업한 오발탄의 시작이다. 하지만 처음엔 물건을 사 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마장동에 가서 물건을 사려고 해도 파는 사람이 없었어요. 곱창은 관리가 까다로워 초짜한텐 안 판다고 하대요. 뭣도 모르는 사람이 사가면 나중에 ‘품질 안 좋다’며 뒷말이 많아 안 판다고 하더라고요. 특히나 대창은 손질이 까다로워서 취급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어요. 절박했던 전 무릎까지 꿇어가며 사정했죠. 지금은 아스팔트지만 그땐 진흙탕이라 다리가 다 젖었죠.”

 이렇듯 매 순간이 절실했다. 그런 이 대표의 정성이 빛을 발한 건 오발탄을 시작하면서다. 특별한 홍보수단이 없었던 그는 직접 가게의 특성을 종이에 빼곡히 적어 신문사에 보냈다.

 “통기타 음악이 흐르는 곱창집, 에어컨이 바닥에서 나와 고기 굽는 연기가 연통으로 잘 빨려간다는 점 등 우리집을 홍보한 거죠. 그렇게 3개월쯤 지나니까 두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지금 음식 먹고 나왔는데 맛있게 잘 먹었다면서 며칠 뒤에 기사가 나올 거라고요. 만약 기사 나간 뒤 손님이 많아지더라도 지금처럼 장사해달라고 말하더라고요.”

 자신의 노력이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이 대표는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기사가 나간 뒤 손님이 몰려 점심 땐 자리없다고 화내며 가는 사람이 많을 정도였단다. 다음해인 2001년 잠시 광우병 논란이 빚어져 또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곧 회복돼 점포가 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과가 나기 시작하자 이번엔 이헌룡 대표와의 관계가 어색해졌다.

 “돈 문제가 아니라 명예 문제가 불거진 거죠. 동업자였는데 사장·부사장 호칭 문제도 있었고. 그래서 내가 나오기로 결심했어요. 중국까지 진출해 점포가 5개 있었는데 제 정성이 많이 들어간 역삼점만 갖는 걸로 하고 독립했어요. 그리고 상호를 연타발로 바꿨죠. 그때 드라마 ‘주몽’이 한창 인기였는데 극 중 소서노의 아버지이자 큰 상단을 이끄는 연타발이란 인물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그처럼 장인정신으로 최고의 음식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아 이름을 정했어요.”

 한 번 서먹해진 두 사람은 2006년 압구정동에 연타발이 들어서면서 더욱 멀어졌다. 압구정동은 이헌룡 대표가 오래 전부터 진출하려고 맘먹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호 대표 역시 뒷골목에 있던 역삼점에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2호점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압구정동에 매장을 낸 연타발은 매년 크게 성장해 지금은 전국 7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동업관계에서 갈라져 나오면서 감정적으로 서로 안 좋은 부분이 있었죠. 하지만 돌이켜보니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됐던 건 사실이에요. 같이 할 때 참 잘 맞았고 협력도 잘 됐거든요. 그러니까 성공했겠죠.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지금의 제 모습이 갖춰진 거고, 그 사람 역시 저를 만남으로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생각해요. 앞으론 각자의 길을 열심히 가야죠.”

 두 사람이 함께 시작한 오발탄 역삼점은 이젠 없어졌다. 오발탄의 본점은 송파점, 연타발의 본점은 압구정점이다.

글=심영주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곱창은 크게 소곱창과 양곱창이 있다. 소곱창은 소의 작은창자를 뜻하고, 양은 소의 첫 번째 위를 말한다. 소는 위가 모두 4개인데, 첫 번째 위가 양이다. 두 번째는 천엽, 세 번째는 절창, 그리고 네번째 위가 막창(홍창)이다. 대창은 소의 큰창자를 말한다.(출처=농수산물유통공사)

◆라이벌 ⑧ ‘일본식 라멘’ 결과는 3월 26일 발표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칼국수’ 투표 방법은 15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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