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442)|전국학연(제47화)|나의 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반탁 강좌>
「피난민 합숙소」는 내 일생을 통해 가장 보람있는 학생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반탁활동의 산실이기도 하였거니와, 여기서 기획해서 손댔던 일 가운데 「반탁강좌」는 특히 잊을 수가 없다.
반탁학련의 조직이 커지고, 중등부학생이 몰려드는가 하면 이북에서 내려오는 청년학도들이 며칠씩 묵고 가는 일이 많아 그들을 정신무장시키는 일이 큰 과제가 됐다.
그래서 「반탁강좌」를 시작했다. 강좌를 통한 이론무장과 함께 특히 이북출신에 대해서는 서북학생후원회와 손잡고 급식처나 일자리를 알선해 주기도 하고 등록금 걱정과 편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여학생들은 기독교회관이나 숭덕학사에 얘기해 머무르도록 했다. 따라서 「반탁강좌」야 말로 조직의 연장이었으며 반탁운동의 특별교실이었다.
강의실은 학련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수표교회. 예배가 없는 시간을 골라서 강좌를 해나갔다. 연사교섭은 주로 나와 계훈제 동지가 맡았다. 안내장이나 강의록은 윤원구·김린수 군 등이 유인물로 작성해서 나눠주었다. 가장 자주 초청된 연사는 당대제일의 이론가이신 조소앙선생이셨다. 그 밖에도 신익희·전진한·김도연·설의식 (전 동아일보주필)·안호상·진승녹·옥선진·엄항섭·윤치영선생 등이 자주 나오셨다.
정인보선생께서도 한차례 국학강의를 해주셨다. 항상 교회가 꽉 찰 만큼 만원을 이루었다.
강의 요지는 꼭 동사해서 배포했다.
1주일에 두 번 이상 계속한 반탁강좌는 수표교회에서 두 달 쯤 실시하다가 학련사무실이 옮겨짐에 따라 천도교강당에서 계속했다. 전국학련이 해체된 정부수립직후까지 계속했으니까 2년 이상 계속한 셈이다. 나는 이「반탁강좌」야 말로 학생운동의 지구력과 연구생을 나타낸 자랑스러운 행사였다고 자부하는 바 크다.
반탁강좌를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당시 민족진영 인사 가운데서 심오한 경륜과 체계있는 이론으로 우리 학생들에게 크게「어필」한 지도자가 있었다면 그는 조소앙선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앙선생은 중국에서 보따리 하나씩을 들고 온 임정요인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인물됨이 가장 대범대책했던 분이다.
수십년 해외에서 독립운동하시느라고 고생하시면서도 그분이 창안한 삼균주의는 한국독립당의 강령일 뿐 아니라 임시정부의 건국강령, 즉 국시로 채택된 이념이었다.
삼륜주의의 골격은 균등주의, 혹은 평등주의라 할 수 있고, 철저한 균등의 상호관련된 2개조의「삼륜」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그중 1조는 정치의 균등·경제의 균등·교육의 균등이고, 다른 1조는 인여인 균등(개인간의 균등)·족여족균등·민족간의 균등)·국여국균등(국가간의 균등) -.
특히 교육의 균등을 강조하신 소앙선생은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은 청년학도의 교육에 달려있다고 늘 말씀하셨고 학생들과의 담소를 즐기셨다.
그 분의 사상과 철학은 차원높고 심도 깊은 것이어서 당시로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분이야말로 세계 각 국의 종교와 사상을 한국적인 상황에 맞춰 흡수, 용해시켜 새로운 한국적인 것으로 창안하고 일생을 이상과 실천의 조화를 위한 노력 속에 보내신 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분을 얼마나 사숙했느냐 하는 정도는 내가 그 집 정문 앞의 한옥집에 하숙을 정해 이사간 사실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학생운동을 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동안 소앙선생은 나에게 정신적 양식과 이론무장을 시켜준 분으로 내 가슴에 자리잡고 계시다. 나의 학생운동에 구체적 도움을 주신 분으로는 우계 전용순선생도 잊을 수가 없다. 우계는 일제시대부터「606호」주사약으로 유명했던 「금강제약」을 경영하신 분으로 독학 자수성가한 분이며 박흥직 최창학 박기효씨 등과 어깨를 겨루던 재벌이었다.
그분은「인촌」선생의 애국정신을 종신할 때까지 신봉하고 실천하신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훗날 상공회의소를 처음 조직하여 초대회장을 역임한 그분으로부터 건국운동과정을 통해 이 박사나 김구선생은 물론이고 민족진영인사가운데 재정적 후원을 받지 않은 분이 없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분은 경제보국회를 조직,「대한노총」(전진한)·「독청」 (서상천) 등 각 애국단체나 한민당을 도왔다. 한민당인사들이 나중에 대부분 야당을 하게 되었을 때도 당초의 약속을 지켜 정부·여당의 압력을 뿌리치고 5·16후 돌아가실 때까지 매달 꼬박꼬박 뒷돈을 보내주신 분이었다. 특히 유석 조병옥 박사의 정치자금은 대부분 우계가 마련했다.
그런 분인지라 학생운동에 필요한 경비는 자상하게 예산을 물어본 뒤 일할 수 있게 꼭꼭 마련해 주셨다. 나는 소앙선생의 이론적 지도와 우계 전용순선생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학생운동을 확대 강화할 수 있었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