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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의 종횡고금 <6> '어지간하다' 는 어디서 나왔을까… 중국문화 흡수한 한국의 창의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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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와 너무 닮았다. 일본문화는 확 다른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오죽하면 라이샤워(E O Reischauer) 등이 『동양문화사』 초판에서 한국문화를 ‘중국의 복사판’이라고 했을까. 그런데도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두고 그들은 언어의 장벽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다.

 과연 그것만일까. 그렇다면 한민족보다 훨씬 강성했던, 같은 알타이어계 종족인 선비족·만주족 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비슷한데도 동화되지 않는 것, 이것이 한국문화 정체성의 핵심이다. 한국은 타자의 문화를 자기화하는 데에 뛰어났다. 요즘 탈식민주의 용어로 ‘전유(專有·appropriation)’라는 문화적 전략을 잘 수행했던 것이다.

 혈연의식이 유난했던 한국에서는 일찍부터 가문의 계보학 즉 보학(譜學)이 발달했다. 이 보학 속에는 우리의 언어·문화가 녹아있다. 고려 때 충주 지씨(池氏)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이 분파하여 창씨를 했다. 그는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에서 성을 어씨(魚氏)로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슷한 것을 두고 ‘어씨와 지씨 사이 같다’고 한 데서 ‘어지간하다’라는 말이 생겼다. 충주 지씨와 어씨는 지금도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조선 세조 때의 재상 이인손(李仁孫, 1395~1463)은 본관이 광주(廣州)로 이극배(李克培)·이극균(李克均)·이극돈(李克敦) 등 극자 항렬의 여덟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조정의 요직을 독차지할 정도로 성세(聲勢)가 대단했다. 당시의 이 집안을 두고 ‘광리건곤, 팔극조정(廣李乾坤, 八克朝廷)’ 즉 “광주 이씨의 천하요, 여덟 명 극자 형제의 조정이다”라는 숙어가 생겼다.

 한문 숙어를 ‘전고(典故)’라고 하는데 이러한 전고를 중국의 학자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당쟁도 한국의 고유한 전고가 발생하는 여건을 조성했다. 선조 때 동인인 정여립(鄭汝立)의 역모 사건을 다룬 기축옥사(己丑獄事)는 무고하게 연루된 사람이 많고 혹독한 심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때 옥사를 주관한 사람이 시인으로 유명한 송강(松江) 정철(鄭澈)이다. 동인의 명사였던 이발(李潑)·이길(李<6D01>) 형제는 정여립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그들은 물론 팔순노모와 어린 손자까지 곤장에 맞아 죽었다. 처참하게 죽은 이발·이길 형제로부터 ‘(찢어)발길 아무개’라는 표현이 나왔다. 숙종 때는 노론과 남인이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시기였다. 남인 중에는 사천 목씨(睦氏), 나주 정씨(丁氏), 진주 강씨(姜氏)가 강경파로 노론을 괴롭혔는데 노론 진영에서 이들을 증오하여 뒤에서 자기네끼리 ‘목정강이를 부러뜨리자’고 다짐하였다. 모두 치열했던 당쟁의 표현들이다.

 어지간(魚池間), 광리건곤(廣李乾坤), 발길, 목정강(睦丁姜) 등 보학에서 유래한 전고들을 보면 천자문이 중국에서 들어오고 우리가 한문을 학습한 것이 분명하지만 이미 그것은 한국의 고유한 언어·문화 안에서 온전히 자기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자를 외래어라고 배척하는 일은 마치 불교를 외래종교라고 한국 문화에서 배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한자를 통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고양시킬 수 있다. 비슷한 것을 짝퉁으로만 보면 안 된다. 고도의 정체성은 도리어 비슷함 속에 있다.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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