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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0) 전국학련(32) ―나의 학생운동 이철승<제47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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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좌우익 대립>
해방후 사회의 탁류는 학원에도 그대로 흘러들었고 보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복학해서 처음 등교해보니 교문 담벼락에서부터 교실 칠판에 이르기까지 각종 벽보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비라」는 연일 살포됐다.
하나같이 좌익진영의 구호였다.
『친일파교수 물러가라』『무능교수 몰아내자』는 학원내부 문제에서부터 『지주계급 한민당을 타도하자』는 정치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선동·선전물이 범람했다.
교주인 김성수선생을 친일파로 몰아 배척코자 맹휴결의까지 서슴지 않던 좌분학생들은 인촌선생에 이어 장덕수·이상유·진승록·안연상교수등 주로 민족진영입장을 분명히 밝힌 교수들을 배척하려했다.
스승을 존경하던 군사부일체의 교풍은 어디로 갔는지 일제치하에서도 온갖 수모를 당하며 교단을 지켜온 스승부터 해치려 했다.
연전의 경우도 「백곰」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백악준교장에 대한 축출운동이 좌익학생들에 의해 내세워졌다. 연전은 「크리스천·칼리지」. 그렇기 때문에 이 학교를 좌익화했을 경우 얻을 국제적인 반응을 계산해 정책적으로 좌익학생들이 많이 입학했고 그들은 소요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맞서 이동원(전외무장관) 장순덕 안경득 최서면(재일) 박갑득 김진홍 김득신 박세영등 우익진영 학생이 크게 활약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도 그랬다.
당시 상대 김세련교무장은 대표적인 좌익계 교수로서 「프락치」조직을 통해 지방인민위원회로부터 추천장을 받은 학생을 대량 편입학시켰고 그래서 상대를 좌익의 소굴로 만들려고 했다.
경향을 막론하고 학원은 좌익학생 때문에 휴강하기 일쑤였고 붉은 깃발을 들고 인민대회에 참가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학교분위기에서 우익학생을 표방하고 활동하기란 말할 수 없이 힘들었고 고충과 위험이 따랐다. 그런 가운데도 우익진영 학생들은 점진적으로 학교의 질서를 잡아 나갔다.
상대에서도 유호선(대한화재보험부회장) 장예준(상공장관) 현영원(신한해운사장) 백남주 최찬영 김재순(국회의원) 정성관(관광공사부총재) 이화식 이창왕등 우익진영학생들이 주동이돼 질서회복에 나섰다.
「캠퍼스」안의 좌익조직은 각종 독서회나 「클럽」활동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이들 학생활동에는 조선공산당 청년지회부와 끈을 대고 있었다. 이른바 학원안의 세포조직이었다. 세포책임자는 물론 좌익골수분자거나 공산당원이 됐다. 『등산「클럽」모입시다』『바둑「클럽」모입시다』『연극부회원모여라』『「럭비」부모여라』―
게시판이나 「캠퍼스」 곳곳에는 「클럽」「포스터」가 나붙었다. 공산당세포원의 마수는「클럽」활동을 핑계로 모임을 거듭하게 하면서 친분을 굳혀가는 동안 점차 사상무장을 강화해 나갔고 조직과 공작을 확대했다.
당시 보전에는 공산당산하조직인 「학통」의 전국위윈장 김연성을 비롯해 주모·강모·이모등 쟁쟁한 좌익계 거물급 학생들이 도사리고 앉아 좌익활동을 벌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여출일구로 유물사관을 설명한 「핌플릿」의 속성이론을 염불외듯하면서 항상 무력부대를 앞장세워 양면전을 폈다. 그래서 체육부는 대체로 좌익의 조직망이 돼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축구부의 김용덕(일명 삐틀이), 응원단장 이영우(일명 벽돌) 그리고「럭비」부의 박모등.
전체학생의 8할가량은 갈대처럼 흔들리고 1할의 좌익학생들은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나머지 1할정도는 우익학생이라 말할수 있었으나 오직 산발적인 대항활동만 할뿐으로 「세력」이라고 일컬을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나마도 눈에 띄는 우익학생들에게는 가차 없는 「테러」가 행해졌다. 설득과 세뇌가 안되는 우익학생의 중심인물은 지령을 내려 폭력으로 위협전술을 썼다. 예컨대 정규헌(보전·전8대국회의원) 유구환(현 노량진경찰서장)군등이 동대문전차 정류장에서 고춧가루세래를 받고 김기해군은 칼을 맞았다.
중심인물이 없던 보전의 우익학생들은 권투부등 운동부를 재건해 자구행위를 갖출수 밖에 없었다.
결국 해방과 함께 잽싸게 「건준」을 등에 업고 이론과 폭력을 병용해서 주도권을 잡은 공산당의 수법은 그대로 학원에서도 적용됐다.
여기서 좌우익의 대조적 면모를 나타낸 일화를 하나 소개해보자.
일본천황이 무조건 항복하던날 8월15일하오2시. 보전의 전교생을 제5교실(강당대용)에 모아놓고 학생감이던 장덕수선생은 『천우신조로 우리조국은 해방이 됐다. 이제 광명의 세상을 만났으니 오직 단결로써 조국건설의 역군이 되어야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뒤이어 등단한 윤행중교수(경제학·월북후 김일성대에서 숙청됨)는 『이제 제군은 사회주의국가건설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대륙권에 붙어 있거니와 일제식민지의 자본주의폭정에 시달린 우리들은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요지로 개인의 생각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학생들의 진로를 사회주의쪽으로 유도했다. 이렇듯 오도된 교육과 사회의 혼란은 더욱 학원안의 좌우익대립을 가속화해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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