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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습은 아직도... -②- 광복30년…이젠 씻어야 할「혼돈의 잔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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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 전 산림청민원실에서 있었던 일. 전남광주에서 상경했다는 L씨(68)가 이마에서 흐르는 비지땀을 연방 씻으며 무엇인가 열심히 담당공무원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L씨는 자기집 뜰안에 있는 3O년생 밤나무 한그루에 흑벌이 생기고 잡벌레가 꾀어 베어내려했으나 도산림당국이 금년영림계획에 들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는 것. L씨는 벌레때문에 참을수 없는 딱한 사정을 여러차례 도산림당국에 호소했으나 담당직원은『꼭 베고 싶으면 산림청 허가를 받아오라』면서 돌려보냈다.
벌채허가를 둘러싼 잦은 말썽 때문에 오해를 살까봐 겁을 먹은 도산림청담당직원이 「상부결재」를 맡았다는 서류상 형식을 갖추어 놓기 위해 L씨를 서울까지 올려 보냈던 것. 상경여비등 1만여원을 날리고서야 마당안의 병든 나무를 밸수있게 된 L씨는 『서류한장 갖추자고 이 고생을 시키는 것이 나라 일을 맡은 공무원의 행정처리자세인가』라면서 투덜거렸다.
학벌과 문벌을 절대시하는 일제의 격식위주의 관료주의 폐습은 정부의 대민행정개선노력에도 불구, 아직까지 근절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관존민비식 사고의 잔재.
격식과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망신을 불러 일으킨 일도 많았다.
지난 69년 「이탈리아」의「피닉스」대학, 「홍콩」의 화남대학, 미국의「인터내셔널」대학 등 실제로 있지도 않은 대학의 가짜박사학위등을 수십만원에 사서 박사행세를 했던 학자등 50여명의 저명인사들이 당국의 조사를 받고 가짜가 들통났다. 모대학의 K교수도 이와같은 「케이스」-.
K교수의 자필이력서에는 65년5월 미국 신학교에서 석사학위를, 3개월 뒤엔 K신학교서 박사학위를, 같은 달에 M신학교에서 또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K씨는 실제로 있지도 않은 유령대학에「브로커」를 통해 2천「달러」씩이나 주고 학위를 산 것이 드러나면서 망신을 했다. 위조졸업장이 나도는 것도 이와 같은「케이스」.
실력은 없으면서 「박사」가 아니면, 또는 대학졸업자가 아니면 행세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그릇된 형식주의가 가짜 소동을 빚게 되는 것.
서울의 거리는 간판의 밀림을 이룬다.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 구멍가게에도 간판만은 큼직하고 버젓하다. 그 이름도 「○○양행」, 「××공사」로부터 「대」자나 「국」자등이 붙어 대개는 어마어마하다. 진열한 상품은 보잘 것 없어도 형식만은 대회사의 흉내를 내야 손님을 끌수 있다는 착상에서 나온 것들.
명동거리에서 「사장님」하고 부르면 10명중 8명은 부르는 쪽으로 돌아선다는 얘기는 뿌리깊이 도사린 격식주의풍조를 단적으로 나타낸 말. 이래서 주인은 「사장」, 주인아내는 「부사장」, 사환은「전무」로 명함을 찍어 다니는 회사 아닌 회사도 등장했다.
H무역회사 섭외부차장을 맡고 있는 J씨(38)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유행에 뒤지지 않는 양복을 맞춰 입느라고 봉급에서 월부금 공제가 끊이지 않는다고 울상을 지었다.
거래선과 접촉을 자주 해야하는 J씨는 옷차림을 그럴싸하게 차리고 다니지 않으면 상대방으로부터 신용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J씨는 실용적이고 부담이 적은 기성복을 사 입을 생각도 않고 한여름에도 마춤복 정장에「넥타이」를 매고 다니며 고역을 치르고 있다.
「옷이 날개」라는 형식구의가 필요이상의 부담과 낭비를 초래하고 있는 것.
우리주변에서 판을 치고 있는 이런 형식주의·격식주의등에 대해 서울대장덕순교수 (국문학) 는『잘못된 형식주의의 뿌리깊은 전통이 지배해 온 이조시대와 관료지배체제가 우월했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어느덧 우리주변에서 형식주의의 폐습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우리는 서구의 실용주의를 적당히 우리 것으로 소화시켜 내실을 기할줄 아는 국민이 되어야겠다. 또 기계화된 현대의 틀속에 빠져 타자지향형 (타자지향형)인간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김광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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