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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제47>전국학련(16)-나의학생운동 이철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서호근로동원>
점점 궁지에 몰린 일제는 학교의 군사훈련을 한층 강화했다.
교련시간은 수업시간보다도 더 많아졌다.
일제는 1942년말 부터는 3학년은「야마모도」소좌 (채병덕 6·25때 참모총장)가 창장으로 있는 부평 조병창에 동원해 군수품을 만들게 하고 2학년은 구청둥 관공서로 끌어내어 각급 잡무를 보게했다.
1학년은 그나마 수업을 반으로 더 단축했다.
총력대니 특설방호단이니 하여 들들 볶았다. 학교를 완전히 병영화한 일제는 학생들을 근로봉사대로까지 동윈했다.
더욱 죄고 또 쥐어짰다.
1943년5월18일 우리 보전생 6백여명은 수원 서호저수지의 준설공사에 나서도록 근로동원령이 내려졌다.
작업기간 6일,숙소는 수원고농 (현 서울대농대) 교실 마룻바닥.
그간 우리들은 온갖 명목의 근로동원을 받아왔지만 전교생이 전교직원과 일시에 동원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우리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일인계 세 학교가 막 작업을 끝내고 돌아간 후였다.
그런데 이때 우리 보전생들은 이들 일인계 세 학과가 해낸 작업보다도 더 많은 작업성과를 올렸던바 그 이면에는 눈물겨운 일화가 담겨져 있다.
우리가 처음 서호에 도착했을 때는 순전히「농땡이」로 일관했다.
「대동아성전」이니「전시비상식량증산계획」이니하여 학생들을 일터로 몰아 넣는 것 자체가 싫었거니와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해 그날그날 파낸 흙을 조사하는 일인의 간계가 더욱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작업총감독「유가와」(탕천·수원고농교장)는 일을 않는다고 매일같이 성화가 대단했다.
그러나 우리는 막무가내 였다. 겨우 하는 시늉만 낼뿐 작업을 시작한지 4일이 지났는데도 할당량은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총독부학무국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막기위해 각급학교에 경쟁을 붙이고 학교별 등급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예 무시해 버렸다.
난처해진 것은 학교선생님들.
그렇지 않아도 보성(일본음 후세이)은 부정(일본음 후세이)으로 낙인찍혀 총독부는 트집만 노리고 있는터에 공공연히「사보타지」로 일관하면 무슨 일이 닥칠지 몰랐다.
인촌이하 전교직원은 체면상 독려에 나섰지만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작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설산 장덕수선생(당시 생도감)이 갑자기 우리를 집합시겼다. 그리고는 일장연설을 했다.
『나는 여러분의 심정을 잘안다. 그러나 우리 조선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굳센 투지와 신체를 갖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조선사람이다. 그런데 조선학생끼리만 모인 보성전문이 여러 학교가운데 꼴찌가 된다면 우리의 체면은 무엇이 되겠는가. 보전학생의 능력이 뛰어나 있다는 것을 천하에 과시하자-.』
눈물과 목소리가 함께 떨어지는 대열변이었다.
물론 이것이 그의 본의는 아닐테지만 조선학생들의 의지에 뜨거운 발동을 걸어주었다.
그의 열변에 우리들은 전류라도 옮겨 받은둣 금방 사람이 달라졌다.우리들은 긴급 간부회의를 열어 보전의 「본때」 를 보여주기로 결의했다.
모두가 웃통을 벗고, 삽이 부러지도록 땅뙈기를 했다. 「당가」(들것)가 부러지도록 흙을 날랐다. 게다가 무슨 신들린 사람처럼 소리까지 지르며 파고, 제치고, 들고, 옮겼다. 금방 태산이라도 깎을듯한 기세였다.
그리하여 남은 날짜에 일인계 세 학교가 한양보다도 더 많은 실적을 올렸다. 일본인들은 그만 혀를 내둘렀다.
작업성과는 당연히 보전이 1등이었다.
그러나 작업감독「유가와」는 보전의 작업은 넓기만했지 깊이가 없다는 핑계로 1등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호를 떠나던 전날밤 우리 보전생 6백여명은 전원이 서호의물가 모래사장에 모닥뷸을 피워놓고 둘러앉았다.
우리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햇·별에 그을려 손과 얼굴에 허물이 다 벗겨진 선생님들의 모습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건만 우리들은 북이 터지도록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괘지나칭칭나네를 부르는가 하면 교가와 교호를 목에 피가 나도록 불러댔다.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서호를 몇번이고 빙빙 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축제는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총검앞에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온 젊은 사자들의 울부짖음이었다.
교수들은 따로 솔밭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 자리를 차렸다. 그러나 인촌을 비롯한 선생님들은 서호룰돌며 아리랑을 불러대는 우리를 지켜보면서 안스러운 생각에서인지 아니면 슬픈 민족의 운명을 자탄해서인지 눈물을 적시고 있었다(고대60년사수록) . 말은 없었어도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마음속을 헤아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시절에는「학원모리배」란말도, 「우골탑」이란 용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낡은 표현일진 몰라도 군 사 부 일체로 스승과 제자와 부모가 한가족이 됐고 「일년지고는 태산지고이 연지고는 태산지고」라하여 선후배관계는 엄격했지만 더 없이 따뜻한정을 주고 받았다.
그시절은 참으로 아름다운 상아탑시절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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