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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울|신태환<전 서울대총장 아세아경제연구소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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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어떤 책을 읽다가 「프랑스」에는 3백50종의 「소스」와 3백50종의 「치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요리가 양요리 중에는 가장 좋다고 생각해 왔지만 이렇게 양념 등등이 많은 줄은 정말 몰랐다. 「프랑스」에서는 한끼 먹는 식사라고 하는 것이 요리인과 먹는 사람사이의 일종의 경쟁같이 되어 있다. 요리인은 항상 더욱 맛있는 음식물을 만들기 위해 애를 쓰며 또 먹는 사람들은 요리인들의 재간을 하나하나 평가해서 요리인을 더욱 향상시키려 애쓰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풍요하다는 것에 대한 권태 같은 것은 없다. 풍요하면 풍요할수록 더욱더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일을 하면 할수록 정교한 것을 만든다. 권태나 정체를 모르는 진보하는 사회의 양상이란 이렇다. 「프랑스」 요리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 어느 해 나는 영국정부 초청으로 영국에 가서 「런던」의 「킹즈·캘리스·호텔」이라는데서 2주일을 머무른 일이 있다. 그런데 그 「호텔」 맨 아래층에는 「런던」 제일의 「프랑스」 요릿집이 있어 생전 처음 「프랑스」 요리를 2주 동안이나 즐기게 되었다. 「메뉴」를 보고는 알 수 없어서 「메뉴」의 위서부터 아래까지 늘어놓은 요리를 차례로 모조리 먹어봤는데, 먹고 나면 반드시 주인이나 그럴싸한 종업원이 와서 요리 맛이 어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3백50종의 「소스」를 알리 없는 촌닭인지라 고작 한다는 말이 『좋았다』는 정도였다. 요리를 평할 재간이 없으니 요리인 입장에서는 『할 수 없는 동양친구』라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어쨌든 물릴 줄을 모르고 즐기는 식도락가와 갈수록 정진하는 예술가인 요리인과의 경쟁에서 「프랑스」의 국민성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프랑스」 사회의 끝없는 풍요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경제학 하는 사람들은 경제발전을 위해 저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술의 혁신이라든가 적절한 소득분배·가격제도·치밀한 경제계획 등을 말한다. 그런데 경제발전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성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국민성은 사회경제 가운데서 일하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경기를 부여하고 협력하게 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프랑스」인들의 요리인과 식도락가 사이의 경쟁에서 배우는 「프랑스」 국민성에 관한 교훈 내지 철학은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 실현을 위해 전적으로 사회에 참여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죄의식이라든가, 부끄러움이라든가, 어려움이라든가, 보수라든가를 제쳐놓고 자기 실현을 위해 지칠 줄 모르는 「다이내믹」한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프랑스」는 「유럽」에 있어서 사실상 큰 경제적 위협의 존재로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북괴에 대한 적대적인 환경, 또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흔히 말하는 불신 환경 속에서 규율을 지켜 나가는 사회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앞으로 이런 사회의 긴장이 풀리게 될 때 이 사회는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가 궁금해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국민총화로 불리는 높은 헌신도·협력도·집중도·창조성·권위를 찾으려면 적대적 환경 아래서 강요된 것이 아니라 영구성을 가진 인간과 사회에서 자연 발생하는 자율적인 것을 살리는데서 찾아야할 것이 아닌가 한다.
매일같이 걸려드는 재산가들, 공무원 숙정을 보는 요즘의 환경 속에서는 사람들은 성공이라든가 부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그 정도가 아니라 타인의 성공은 내 실패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증오하고 적대시한다. 우리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를 배격하는 것은 일리가 있고 당연하나, 남의 높은 지위를 불의로만 생각하고 남의 축적된 부를 부정으로만 생각하는 풍조가 있다면 문제다. 풍부한 것에 대한 권태 아닌 권태, 성공에의 자극의 감퇴. 이런 사회적 거부 반응이 이 이상 더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런 것에 「센세이션」을 느낄지는 모르겠으나 이것은 자기 붕괴적이고 긴장을 강요당하면서도 긴장 상실의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적대환경에서도 풍요를 위한 권태를 모르는 경쟁심과 사회적인 어떤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기 실현을 위해 과감한 국민성에의 자극과 조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좋은 국민성의 소생, 아니 그 형성이야말로 우리 경제사회 발전의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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