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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보건법과 인간의 존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자유와 존엄」은 인간의 숙명적 과제인지도 모른다. 존엄성을 지키려는 의지와 냉혹한 과학성을 위해 인간을 버리려는 용감성이 늘 사람에게 고민을 안겨다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성과 도덕의 가치를 사랑한「칸트」도 있었고, 사람의 가치, 그 자유와 존엄성을 과도하게 내세우는 나머지 과학적 객관성 앞에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놓칠 수도 있다는「스키너」의 주장도 나온다.
보사부가 충남 정심원에 수용중인 유전성 정신질환 여성 9명에 대해 모자보건법을 적용해서 불임 시술명령을 검토한다는 사실도 그런 예의 하나다.
보도에 의하면 이들 질환여성 9명의 한국원자력연구소 생물학 연구실「팀」의 생태조직학적 실험에 의해 유전성으로 판정됐으며, 보사부는 이에 따라 7월중에 가족계획심의 위원회를 열어 시술명령여부를 확정짓는다는 것이다.
73년에 공포된 모자보건법은 보사부 장관이 우생학적 유전방지라는 공익상의 이유로 불임시술 대상자에게 불임수술을 명령할 수 있고 이 명령을 받은 자는 불복할 경우 2주 이내에 그 명령의 취소를 구하는 행정소송을 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규정은 이번의 경우 시술 대상자가 모두 고아여서 소송의 제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어떻든 국내에서 처음이 될 강제불임시술의 가능성을 앞에 놓고 인간의「자유와 존엄」의 시련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유전성 질환」이라는 엄격한 과학적 판단 편에 서서 개인적으로 비극이고, 사회적으로 폐해가 큰 이들 유전성 질환자의 확대를 막자는 입장과 이에 반대하는 「휴머니즘」및 생명외경의 입장 사이에서 곤혹을 겪는다.
강제불임시술은 실상「모자보건법」이라는 법률의 집행에서 볼 때 합법적이며, 거의 틀림없이 또 다른 불행한 인간을 사회에 무책임하게 양산하는 부도덕성을 애초에 막는다는 명분에서 보면 인간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가족계획이 장려되는 현실에서 볼 때 그것은 커다란 무리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강제불임시술은 보다 큰 반대를 수반하게 된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생명의 외경을, 자연의 섭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정신이 인간에게 가장 뿌리 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현대를 지배하는 과학성도 아직은 불확실성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반대의 근거를 더 강화해 준다.
고아이기 때문에 가계조사도 못하고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효소조사도 하지 못하고, 오직 염색체 조사만으로「유전성」을 확정한 상황에서 강제불임시술은 인간경시의 표본이 될 수도 있다.
우생 학자들이 인간자원의 개선을 위해서 우생 주의에 기반을 둔 선택적 생식을 주장하는데 대해서도 저항은 계속되어 왔다. 인간의 유전자의 구조를 개선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구조변경의 시도를 정당화할 과학적 근거도 아직은 없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데 하물며 이에 연관된 인간주의적 근거나 존재론적 근거 내지, 종교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이같이「인간」의 존엄성을 강제력으로 간섭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나치」가 우생학의 논리를 자기민족 개량에 적용, 질환자의 강제불임시술과 유대인 학살의 만행을 저지른 것도 그 문제의 심각성을 입증한다.
논리의 정당성, 이론의 합리성을 주장하고 그것을 과신하여 벌이는 인간학대의 죄과는 심각하다.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하게 압살되는 경우는 수 없이 많지만, 합법성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강제불임시술의 위험성도 인간존엄의 조그만 수호노력의 일환으로서 다시 한번 신중히 생각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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