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상)|전쟁 재발 위험은 그대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한국 전쟁을 정치와 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해 볼 때 이처럼 복잡 미묘한 전쟁도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의 세계 적화의 앞잡이로서 북괴가 남한을 침범했고, 군사적인 면에서는 엄격한 제한 전쟁이긴 했지만 핵무기 이외의 모든 군사 수단이 총동원된 가열한 근대전이었다. 또한 종전 수법도 어느 일방의 항복이나 굴복이 아닌 휴전이었다. 이래서 4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전쟁 재발의 위험은 그대로 남아 있다. 본사는 당시 총 대신 「펜」을 들고 전쟁을 취재한 종군 기자들로부터 「6·25」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와 거기서 얻은 교훈 등을 들어보았다.
▲사회=우선 「6·25」 그날의 상황이 어떻게 벌어지기 시작했는지 부터 말씀하시죠.
▲이지=공일인 그날, 우리들 5∼6명의 국방부 출입 기자들은 2사단장 이형근 장군으로부터 주말을 같이 즐길 겸 장병들의 모내기 지원 작전도 좀 써달라는 모처럼의 부탁을 받고 대전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전날 밤을 이 사단장과 같이 보내고 상오 9시쯤 느지막하게 일어나 모내기 현장으로 가 있는데 갑자기 『서울에서 비상이 걸려 부대를 몰고 오란다』는 밑도 끝도 없는 얘기가 나도는 것이었습니다. 모내기를 거들다 말고 아무래도 뒤숭숭해 이 사단장에게 물어봤더니 그제서야 『올라 가봐야 알겠다. 병력과 장비를 기차로 싣고 가니 같이 타고 가자』해요.
그때가 아마 하오 2시쯤이 됐는데 우리는 그것이 바로 6·25인줄도 모르고 그저 황급히 따라 붙었죠.
▲사회=사단장도 전연 남침을 몰랐읍니까?
▲이지=몰랐죠. 이 사단장은 곧장 청량리로 가고 우리는 서울역에서 내려 회사에 뛰어들어 가보니 난리가 나 있었읍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용산 육본으로 내달아 상황실 지도를 봤죠. 벌써 38선 전역이 터진 자국이 뚜렷이 그려지고 있었읍니다. 보통 난리가 아니구나 하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죠.
그리데 저녁때 전 전선이 밀리고 있는 전황을 취재해 들어가니 회사에서 도대체 믿어주지를 않아요. 납치됐읍니다만 모부국장이 내 기사를 보고선 『국방부 기자가 좀 더 용감해야지 이따위 비관적인 것을 써내느냐』고 느닷없이 호통을 쳐요. 당시는 누구나 『점심은 평양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고 무턱대고 큰 소리를 칠 때여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은 것입니다.
▲사회=육본만은 정확한 전황이 들어오고 있었군요.
▲당=그런 셈입니다. 그러나 3일만에 서울이 떨어진다는 상황은 생각도 못했고 그저 그때 티격태격한 송악산이나 옹진 반도 전투보다 좀 큰 것이려니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이혜=나는 경향에 간지 불과 1주일도 안됐습니다. 그날 11시쯤 소공동에 나왔다가 『장병들은 빨리 귀대하라』는 군「지프」들의 요란한 「마이크」 방송을 듣고 편집국에 뛰어들어갔다가 전쟁을 알았습니다. 지금 증권거래소가 된 명동 정훈국도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어 처음 나온 「윌리스·지프」에 사진 기자를 태우고 바로 의정부로 달렸읍니다.
도봉동을 넘어서자 대포 소리가 쾅쾅 들리고 벌써 소달구지에 짐을 잔뜩 실은 피난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읍니다만 한쪽에선 태연히 모심기를 하고 있어 전쟁이 터졌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7사단 CP에 뛰어들어보니 벌써 괴뢰군 몇명을 잡아놓고 다발총도 몇 자루 뺏어 놓은 가운데 장교들이 심각한 인상으로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전쟁이 나면 문제없이 밀고 올라가는 환각 속에 빠져있을 때라 나도 『때는 왔다. 북진 통일』하고 머리 기사를 써 젖혔죠.
그랬더니 이북 출신인 편집자 이시호·임순묵씨 같은 친구들이 고향을 가게 되는 줄 알고『속 시원히 잘 썼다』고 칭찬해 줍디다.
▲장=나는 11시쯤 수도 극장서 영화를 보다가 역시 「귀대」를 알리는 장내 방송을 듣고 회사로 뛰었읍니다. 그날 밤은 회사서 세우고 26일 아침 「드리쿼터」로 문산에 가보니 1사단이 거기까지 후퇴해 있었으며 임진강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이 내려와 있었어요. 개성은 25일 새벽에 괴뢰군이 기차로 들어왔대요.
▲정=나는 전날 7사단 5연대 창설 1주년 기념식을 보러 온양에 내려가 있다가 상오 7시쯤 「비상」을 알았읍니다. 천안까지 「드리쿼터」를 타고 나와 11시 특급 삼천리호를 잡아타니까 맨 뒷간 전망대차에서 군대를 끌고 올라가는 이형근 장군을 만났습니다. 이 장군은 그때까지 만도 『본때를 보여줄 때는 왔다』며 사기 충천한 말만 하고 있어요. 서부 전선으로 바로 달려가 보니 벌써 임진강은 적이 석권을 했어요.
경향의 박성환 기자와 북괴의 논물 단수 조치로 아우성이 난 연백·청단·백천 쪽을 둘러보고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기사를 쓴 것이 불과 1주일전인데 말입니다.
▲이지=생각하면 그런 보도를 해온 우리들의 책임도 큽니다.
▲사회=말이 나왔읍니다만 당시의 정세와 관련한 보도 경향은 어땠읍니까?
▲최=솔직히 말해 그때 안보 논의는 일종의 「터부」처럼 돼 있었읍니다.
고랑포 파견 HID대장을 하던 김병학·김경옥씨 등 정보 관계 소장 장교들은 나만 보면 「탱크」부대를 찍은 북괴 노동 신문을 들이대 『이 사실을 써달라』고 호소를 했어요. 나와 특히 친했던 김병학씨는 심지어 『최형, 고위층과 어울리기만 하지 말고 이걸 써달라』며 애타했습니다. 이래서 나는 신성모 장관께 이 문제를 여러 번 따져보기도 했으나 『다 압니다』고만 할 뿐 별수가 없는 듯한 반응이어서 안타까왔읍니다. 「프락치」들이 끼인 탓도 있지만 국회마저 이북의 군사력 증강을 「브리핑」하면 『예산을 많이 타기 위한 위협』이라고 일축하기 일쑤였으니까요.
▲사회=육본의 공기는 남침 임박을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이지=10여일전 쯤인가요, 신 국방장관이 『38선에 위기가 있다. 이걸 막으려면 미군의 군사 지원이 긴요하다』는 요지의 성명을 냈고 이어 이 대통령도 비슷한 발표를 한 것으로 보아 위기는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어느 정도 심각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사회=미군 측의 정세 판단은 어떠했읍니까?
▲이지=우선 당시의 장비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고무 「타이어」 장갑차와 「캐나다」서 들여온 기관총을 단 이른바 건국호 10대가 고작인데 북괴는 49년에 벌써 「탱크」 1백50대와 「야크」 전투기 2백대로 중무장하고 있는 것이 노동 신문에 나타나고 있었어요. 상대가 안 되는 차이여서 우리들은 언제나 불안했읍니다.
그런데 6·25 1주일전쯤 마침 임무를 끝내고 귀국하는 「라비즈」 미 군사 고문 단장의 기자 회견이 있어서 우리들은 이 군사 불안에 관해 질문을 했습니다. 이북의 저 많은 「탱크」와 전투기를 어떻게 보느냐구요.
그랬더니 「라비즈」 준장의 대답은 『한국에 「탱크」가 다닐만한 다리와 도로가 어디 있소. 또 좁은 바닥서 비행기가 날면 얼마를 날겠소』하고 아무 소용없다는 투의 냉소적인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태도가 단적으로 드러난 이야기로, 이런 상황이 그대로 보도되고 그것을 국민들은 믿곤 했지요.
▲정=그 자리서 「라비즈」는 「탱크」는 한국과 같은 산악전에선 못 써 먹는다』고 하지 않았읍니까. 그는 한국군은 「아시아」서 가장 잘 훈련 돼 있기 때문에 걱정 없다고 치켜세우기만 하고 뒤로는 장비 개선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읍니다. 「라비즈」는 귀로에 동경 「프레스·센터」서 기자 회견을 갖고 『한국에 북괴의 전투기를 떨어뜨릴 고사포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아마 새를 쓰는 고무 총 밖에 없을 것』이라고 장비 지원이 없었음을 실토했었읍니다.
▲이지=북괴의 기만·위장 전술에 속아넘어간 것도 지적해야겠죠. 그들은 조만식 선생과 김삼룡·이주하의 교환 날짜를 몇번이나 연기하다가 그때 28일로 다시 제의해 오기도 하고 여현서는 UN 한위와 계속 접촉하는 등 교묘한 위장 전술을 썼었지요. 여기에 속아서 서울을 3일만에 뺏긴 셈이지요.
▲사회=6월28일 새벽 공산군이 서울에 들어왔을 때의 상황을 보신대로 간추려 봅시다.
▲이순=27일 박성환·김창만 기자와 셋이서 피난을 가기로 하고 회사에서 남대문까지 갔으나 어머니를 뵙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명륜동 집으로 들어갔다가 오늘밤을 자고 가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에 그만 피난길을 놓치고 적 치하에 갇히게 됐습니다. 해거름 때까지만 해도 미아리 쪽 능선에 우리 군인이 진을 치고 있는 등 별 일이 없었으나 밤이 되면서 갑자기 포가 떨어지고 난리가 났읍니다.
비마저 억수같이 쏟아져 움치고 뛸 엄두도 안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날이 밝자마자 쫓기는 우리 국군들이 몸 숨길데를 못 찾아 골목골목 대문을 두드려요. 그러나 모두들 겁이나 선뜻 문을 열어주는 집이 없었습니다. <계속>

<참석자>
이지웅씨 (동양 통신 상무·당시 연합 신문 기자)
이혜복씨 (KBS 보도 해설 위원·당시 자유 신문 기자)
장명덕씨 (사업·당시 합동 통신 기자)
정성관씨 (국제 관광 공사 부사장·당시 평화 신문 기자)
최기덕씨 (오양 석재 산업사 회장·당시 국제 신보 기자) (가나다순)
▲사회=박경천 본사 편집부국장
▲장소=본사 회의실
▲기사=사회부 김형구·김영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