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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싱가포르의 호상 정원상씨(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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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보따리 무역으로 시작한 경남무역은 그런 대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긴 하지만 중국인과 인도인이 상권을 잡고있는 이곳에서 몇 안 되는 조선사람이 이들과 경쟁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이 통치하는 지역이라 비교적 질서는 잡혀있었으나 인도·중국상인들의 텃세는 대단했다. 민족끼리 단결해 따돌리는데는 견디기 어려웠다.
원상 씨는 신용과 끈기 그리고 아침 6시부터 밤12시 가까이 까지 일하는 부지런으로 버텨냈다.

<39년 이역서 부친별세>
영국인 밑의 인도·「말레이지아」인 하급관리도 소수민족에게는 냉담했다. 이럴 때는 「래플즈」교 동창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집안이 자리를 잡아 동생 원성 씨는 영국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정씨는 일가가 「싱가포르」에 올 때는 여권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몇 년 후 일본영사관에서 여권을 받았는데 부친 대호씨만은 일본여권을 거부했다. 그러나 아들들에게는 『젊은 나이니 꼭 나를 따르라곤 않겠다』고 자유행동을 허용했다.
여권을 만들면서 그들 형제는 모두 변성명을 했다. 이름에서 원자를 빼 정국·정창·정상·정성으로 바꿨다.
경남무역이 고비를 넘어서 기반을 잡은 뒤 정씨는 1938년 중국인인 「앙·차이·뇨」양과 결혼했다. 정씨 나이 27세 때였다.
그 다음해 39년 가족을 「싱가포르」에 까지 데려온 아버지 대호씨가 이역에서 파 충성을 다해다오.
『내가 죽거든 절대로 일본 놈 산소에는 묻지 말아라.』
이 유언에 따라 조국독립을 못보고 유랑한 항일지사는 「싱가포르」의 천주교 무덤에 묻혀졌다.
어쩌면 부친의 별세는 일본세력이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기승하는데 대한 좌절과 울화 때문에 촉진된 것 같았다.
37년부터 중국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던 일본은 41년7월 불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했다.
그해 12월8일 「하와이」의 진주만 공격과 때를 같이해 일군은 「말레이」반도에 상륙했다. 이것이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의 전쟁의 시작이었다.
총동원령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적국민에 대한 체포령이 내렸다. 정씨 가족도 일본식민지 사람이기 때문에 체포대상에 포함됐다.
그렇지만 정씨 가족이 반일 적인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주위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자유롭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정씨 형제 등 조선사람들만은 인도의 「뉴델리」수용소로 옮겨졌다. 부인 「앙·차이·뇨」 여사는 중국사람이었기 때문에 수용대상에서 제외돼 정씨 부부는 41년12월 단장의 이별을 했다.

<뉴델리 수용소선 통역 역할도>
이들의 수용소는 「뉴델리」공단에 있었다. 국적은 일본인이지만 일본사람이랄 수 없는 20여명이 이곳서 4년 가까이 포로 생활을 했다.
가족단위의 수용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격리 수용됐다. 그러나 포로생활치고는 비교적 자유로웠다. 격리 수용되어 있더라도 가족끼리는 가끔 만날 수도 있었다.
수용소의 음식은 주먹밥과 소금국이었다. 음식물은 부족했다. 그렇지만 전쟁 중에 그 정도의 대우를 해준 것도 고맙게 생각했다.
그는 영어를 잘한 덕택에 수용소 생활을 특히 편하게 지냈다.
수용소에서 통역과 사무보조역할을 했다. 그래서 조금은 음식도 나았고 고생도 덜했다.
몸은 견딜 만 했으나 장래에 대한 불안과 「싱가포르」에 두고 온 부인걱정 때문에 잠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일본이 42년2월15일 「싱가포르」를 함락했다는 소식은 오래 뒤에 경비병에게 들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에 남방최고 사령부를 설치했다는 것 이상의 「싱가포르」 소식을 알 수 있었다.
「버마」에 들어온 일본군이 인도침공을 노리고 있으며 그렇게 되면 포로들에게도 또 한차례 고생이 있으리란 걱정이 43년 후반기까지 1년여를 악몽처럼 괴롭혔다. 경비병들로부터 44년부터는 전쟁의 국면이 영국 등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송환선으로 26년만에 귀국>
일본이 무조건 항복 한뒤 이들 포로들은 석방돼 조국이나 자기 연고지로 송환됐다. 그의 형제들은 45년4월2일 부산에 도착했다. 실로 9살 때 고국을 떠난 지 26년만에 보는 조국이었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1946년4월은 좌우대립이 상당히 심각하던 때였다. 전후의 급격한 「인플레」로 경제활동도 무척 둔했다.
26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감격만으로 살순 없었다. 사업을 해야겠는데 모든 여건이 마땅치 않았다.
국내실정이 어두운데다 전반적으로 경제활동이 침체했다. 더욱이 영국식교육을 받은 그이 합리적 사고방식이 잘 통하지 않았다. 친지를 떠나 남편 나라에 온 부인 「앙·차이·뇨」 여사의 외로움이 보기에 딱했다.
형제들은 경남무역주식회사를 만들기로 하고 그가 「홍콩」지사를 맡기로 했다.
그는 미군정으로부터 제7호 여권을 받아 47년 초 「홍콩」으로 떠났다.
채 1년이 못되는 그의 고국생활은 하는 일없이 지낸 휴식기간이었다. <「싱가포르」=성병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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