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 10억, 10억" 외치며 시작 … 매일 20명에게 낚시 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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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방경찰청은 지난달 26일 중국 난징 등에 6개의 콜센터를 차려놓고 400여 명으로부터 2억7000만원을 가로챈 보이스피싱 조직을 검거했다. 사진은 조직원들이 친목 도모를 명분으로 지난해 중국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 난닝(南寧)에서 족구대회를 하는 장면. [사진 울산지방경찰청]

처음에는 단순한 텔레마케터 일인 줄 알았다. 구인 사이트에서 ‘TM(텔레마케터) 모집, 기본급 120만원’이란 글을 보고 찾아간 대구의 한 사무실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매일 스무 통 이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말들이었다.

 “저희 대출상품은 서울보증보험이나 신용보증기금, 한국자산관리공단의 법무보증사, 신용회복기금 등 신용정보사에서 신용보증 승인을 받은 것으로….”

 지난해 1월 처음 사무실에 왔을 때 김 실장이란 사람이 이른바 ‘멘트지’를 내밀었다. A4 용지 4장에는 각종 시나리오와 멘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처음 사흘간 나는 이 멘트지만 달달 외웠다. 김 실장 앞에서 암기 테스트를 통과한 뒤에야 실제 업무에 투입됐다.

 사무실에선 모두 남녀 다섯 명이 근무했다. 각자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전화기 한 대뿐이었다. 우리 다섯은 매일 전화기를 붙들고 누군가를 속여 돈을 빼내는 일을 했다. 우리는 텔레마케터라고 불렀지만, 서로 알고 있었다. 우리의 업무가 실제로는 보이스피싱 사기라는 걸. 출근 시간은 오전 10시쯤. 출입문 앞에 도착하면 김(34·여) 부장이라는 사람이 문을 열어줬다. 우리는 출입문의 비밀번호도 알지 못했다. 다섯 명 모두 출근하면 김 부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오늘은 상담원 역할 3명, 심사팀 역할 2명으로 나눕니다. 각자 시나리오·멘트 잘 점검하세요. 자, 구호 외칩시다. 이달 목표는 10억!” 구호를 외치고 나면 김 부장이 20명씩 작업 대상을 나눠줬다. 이들의 이름·주민등록번호·휴대전화 번호 등 개인정보가 담긴 자료는 비밀 홈페이지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별도의 기록지도 있었다. 이곳에는 직장명·신용정보 등 전화 통화로 알게 된 새로운 정보를 모두 기록해야 한다. 혹시 피싱에 실패하더라도 다음에 다시 시도하기 위해서다.

 업무 때 우리는 가명을 쓴다. 나는 주로 ‘OO은행 김XX 팀장’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이 가명으로 매일 평균 20명을 상대로 금융 사기 전화를 거는 게 일과였다.

 “고객님, 김XX 팀장인데요. 대출 필요하시죠? 저희가 저금리로 대출을 안내해드리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 전화는 미끼였다. 우리는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일단 사금융에서 고금리로 대출을 받도록 유도한 뒤 “금리를 낮춰주겠다”며 채권 비용으로 대출액의 30~40%를 챙겼다. 물론 실제 채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화려한 언변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무작위로 발송되는 문자는 하루 20만 개. 이 가운데 통상 60건 이상의 콜이 이뤄졌다. 당초 근무 조건에는 한 명을 낚을 때마다 7000원씩 수당을 받는 걸로 돼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이상이었다. 3000만원 이상 한 명만 대출을 유도해도 약 600만원의 보너스가 지급된다고 했다. 처음엔 기본급만 겨우 받았는데 일이 익숙해지자 월 300만원 이상도 거뜬했다. 숙련된 고참 중에는 월 800만원을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김 실장도 텔레마케터를 하다 전 재산을 털어 이 사무실을 차렸다고 한다.

 점심은 무조건 배달이었다. 이름 모를 직원 2명이 배달 음식을 갖고 왔다. 점심 식사 후 휴식 시간을 주지만 스마트폰을 못 보게 했다. 업무 폰만 쓸 수 있는데 사적인 용도로는 사용이 금지됐다. 실적을 올리려면 퇴근 시간 6시까지 자리에 앉아 부지런히 전화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범죄 행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사무실 사람들은 시흥경찰서 대출사기전담팀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이서준 기자

 ※이 기사는 지난해 3월 시흥경찰서에 붙잡힌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의 일원 박모(25·여)씨의 경찰 조사 내용을 토대로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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