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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휴전「무드」…「면담」탐색 본격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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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아이언·월 타파 제의는 여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박정희 대통령 면담제의가 나은 23일 이후 여-야는 정치휴전 무드 속에서 면담 탐색전을 본격화해 가고 있다.
여-야는 27일까지 1건의 대변인성명도 내놓지 않았으며 평소에 어울리기 힘든 C각·A호텔·K음식점 회동도 빈번하다.
여-야간에 가로 놓여 있는 이른바「아이언·월」(철벽)타파는 여당권에 의해 먼저 제기되어 이효상 당의장 서리는 당 간부 모임에서『대통령이 재야인사 및 야당지도자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고 말한 일도 있다.
그렇지만『여당인사와는 점심 한 끼만 같이해도「사꾸라」로 몰린다는 야당풍토』때문에 「행동」없는「거론」으로 끝났다. 박준규 정책위의장이「신문에서의 대화주선」과 비 정치인의「메신저」역 개입을 조심스럽게 타진했을 정도.
그러던 것이 신민당의 면담제의가 터져 나왔고 그후 면담추진 접촉은 본격탐색으로 발전했다.

<이심전심 성사방향으로>
『김 의원, 오늘 대통령면담을 정식으로 제의할 생각이오』일. 23일 이른 아침 김 총재의 전화를 받고 상도동자택에 들른 김수한 의원에게 김 총재는『오래 전부터 혼자 구상해 왔다』는 박대통령 면담구상을 공개.
김 총재와 김 의원은 당사까지 가면서 차 속에서도 논의를 계속, 성명서초안을 구상했으며, 진산 1주기 추도식준비관계회의가 상오9시30분에 소집된 직후 김 의원은『중대발표니까 흑판에 적겠다』며 면담제의 내용을 발표. 뒤이어 김 총재는 24일 긴급확대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야당총재가 대통령 만나는 것을 정권 적 차원에서 이용한다면서 질이 아니겠느냐』며 김 총재는 영수회담제의가「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한 것임을 강조했다.
이민우 중앙상무 위 의장은『사전에 충분히 다져 확정된 뒤 밝힐 일이지, 왜 먼저 신문에 발표했는지 모르겠다』며『성사될 때까지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 좋은데…』라고「비밀」유지를 역설. 이에 대해 이중재 의원은『비밀로 하면 당내에 부작용이 생길 우려도 있고 재야세력과 야당의 단합을 위해서는 발포하는 것이 괜찮은 것』이라며.
『「분위기 조성」을 위해 당분간 자극적인 언동을「유보」하여 면담회피구실을 주지 말자』고 했고, 김수한 의원은『정일권 의장 서독방문에도 우리의원을 수행시키고 의원지방 시찰에도 참가하자』고 재의. 박영록 의원은『어제아침에 면담을 제의하고 저녁에 민주전선을 가판 한 것은 자극할 우려가 있은 것 아니냐』며 분위기를 위해서라면『예정된 행사라도 연기해야 할 것』이라고 적극 론을 폈고, 이택돈 대변인은『모두 이심전심으로 성사되는 방향으로 적극 추진하자』고 유도발언.
『어떠한「채널」을 통해 접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신·공한·대인접촉 등 여러 가지 방법이 거론됐다.
여당의 첫 반응은 면담제의가 있던 23일 낮의 박준규·길전식·김용태·구태회 의원 모임에서『사태의 움직임을 예외주시하고 대야자극발언을 삼가기로』함으로써 긍정 쪽으로 선회.

<여선 각계 합석면담도 검토>
공화당은 24일 열린 당무회의에서「자극발언 삼가」를 결의 형식으로 채택할 예정이었으나 장경순 중앙위의장의 당직 서열발언으로 올려지지 않았고 뒤이어 대변인 성명으로 이를 밝힐 것을 검토했으나 여야화해 무드의 급진전으로 취소했다.
탐색전은 주한「크메르」대사를 위해 24일 밤 이루어진 박준규 의장주최 C각 만찬에 신민당의 유치송 사무총장·이중재 정책심의회의장이 참석해 적극화됐고, 이 회동이 끝난 뒤 2차로 이들과 박준규·길전식·김용태 의원 등 공화당 간부들은 A호텔로 가 다시 어울렸다.
뒤이은 25일의 공화·신민의 두 김 총무의 공식 접촉, 25일 밤 김진만 부의장이 주최한 K음식점에서의 퇴임장관 위로연에서의 여-야 간부 대좌 등으로 면담을 위한 예비대화는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는 편.
김 총재의 면담교섭「채널」은 여-야 간부접촉이외에 김수한 의원→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선, 김 총재와 행정부 요인과의 직접 접촉설 등 이 나올 정도로 다각적인 것이 특색.
여당 쪽에서는 면담형식을 놓고 김 총재와 박대통령의 단독면담이 아닌 국회의장단·학계·종교계 지도자 등과의 합석도 검토하고 있으며 시국대처를 위해서는 이런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견해도 일부에선 내놓고 있다.

<여야, 모두「득」이 될 수도>
김 총재의 면담제의에는 복합적 요인이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 공화당 쪽의 분석.
첫 번째 월남과 크메르 사태, 김일성의 중공방문 등으로 인한 안보문제가 국정의 기본과제로 부각됐다는 점. 그 다음이 △극렬 대여 투쟁을 기피하는 당내동향 △안보 우 선에 의한 개헌투쟁 무드의 심전 △평행선상의 대여관계에 있어서의 돌파구마련 등이 저변이유로 들어지고 있다. 더구나 김대중씨가 거듭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나서고 있어 제1야당 총재로서의「이니셔티브」장악과 면담에서 얻을 김영삼「이미지」의 격상 등을 쟀으리라고 관측하고 있다.
면담이 이루어져 공화당으로서 얻고 빼앗기는「득」과「실」은 무엇일까? 우선은 야당과의 안보협조체제구축이 이루어짐으로써 국내정치에서의 위화·반목·적대요소 등 상당부분을 제거시켜 안보의 양극화현상을 지양할 수 있다는 이점이 나을 수 있다. 여·야 협조로 5, 6월로 이어지는 봄철소요도 제독이 될 수 있지 않으냐는 풀이가 가능하다.
반면 면담에서 개헌문제 등이 거론되면 정쟁격화의 계기가 될 수 있으며 김 총재의 이미지부각과 위치격상에만 치중되어 정치적으로 이용될 우려가 있지 않으냐는 점이 여당이 꼽아 보는「마이너스」측면.
그렇지만 김 총재가 말하는 것처럼「정치차원 아닌 국가차원」,「과거」가 아닌「장래」문제로 대화가 진행된다면 손익계산서를 낼 수 없는 상호「득」의 면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면담 가능성은 50·5%라고>
면담가능성 여부에 대해서는 여-야 어느 누구도 점을 못 치고 있는 상황.
김용태 공화당 총무는『면담의 주선에 노력만은 할 수 있다』고 여당간부로서의 활동한계를 그었고 길전식 총장은『정치는 일은 위험한 일』이라며『오로지 대통령만이 판단해서 결론을 내릴 문제』라고 신중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종직 유정회 대변인은『면담이 꼭 이뤄질지는 미지수지만 방법여하에 따라서는 이뤄질지도 모른다』고 했고 신형식 재무위원장은『길을 잘만 찾는다면 혹시…』라고 가느다란 가능성을 시사.
반면 신민당의 이중재 의원은『「기브·앤드·테이크」식의 흥정을 하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 될 것으로 본다』고 낙관론을 표명.
김수한 의원(신민)은『속전속결 식으로 면담이 이루어질 것으로는 보지 말라』고 신중론을 폈고, 신광순 공화당 사무차장은『면담가능성을 50·5% 정도로 보면 적절할 것』이라고 빡빡한 진단을 했다.

<63년 이후 영수회담 3차례>
63년 12월 민정이양후 박대통령과 야당 당수간의 이른바 영수회담이 열린 것은 모두 3차례.
첫 면담은 65년 7월20일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이 박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이뤄졌다.
「박-박 회담」에서는 △헌정질서 유지와 여야 극한대립 지양 △제51회 임시국회의 폐회와 52회 임시국회 즉각 소집 △임시국회에서의 한일협정비준 및 월남파 동의안심의 등 5개 사항이 합의됐고 그후 민중당의 대여투쟁은「온건노선」으로 전환됐다.
그러나 박 여사의「온건노선」이 당내 반발을 불러일으켜 윤보선씨가 탈당, 신한당을 창당함으로써 모처럼 재야통합이 분열되는 부작용을 빚었다.
유진산 총재가 박대통령의 공식초청으로 면담한 것은 70년 8월29일과 73년 6월21일 2차례. 이 면담의 특징은 면담하기 위해 청와대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철저히「베일」속에서 추진된 점. 70년 8월의 면담은 당시 김진만 공화당 총무와 고흥문 신민당사무총장이 막후 주역을 맡았으며 이 면담에서는 8·15선언 등 통일방안과 안보문제, 국정전반에 관해 광범하게 의견교환이 이루어졌다.
박대통령에 의한 오찬초청 형식으로 이뤄진 73년 6월21일의「박-유 회담」은 김진만 국회부의장·김용태 공화당 총무와 신도환 신민당 사무총장·이민우 신민당 총무 등 4자가 4개월 동안 막후 교섭한끝에 이뤄진 것. 이때도「보안」이 철저했으며 이틀 후에 발표된 「6·25선언」에 대한 사전 브리핑도 있었으나 유 총재는『사전누설 않겠다』고 약속.

<김재혁·고흥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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