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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다서 건진 ‘꽃’ 푸르른 기운이 넘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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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호 22면

1 얼핏 보면 꽃처럼 고운색이라 ‘꽃멍게’라는 이름이 더 없이 잘 어울린다

봄이다. 서울과 수도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통영은 봄이다. 이곳저곳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볕이 잘 드는 곳뿐 아니라 이제는 짙은 그늘 속에 있던 나무들도 빨간 꽃을 피우고 있다. 그리고 바다에서도 붉은 꽃잎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꽃은, 맛까지 기가 막히다.

정환정의 남녘 먹거리 <11> 통영 멍게

통영의 봄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것은 다름 아닌 동백. 구슬만큼 단단하게 뭉쳐 있던 빨간 꽃봉오리가 어느 날 문득 노란 수술을 살며시 드러내면 드디어 봄이 시작되었음을, 이곳 사람들은 실감하게 된다. 두꺼운 옷을 정리하고 겨우내 꽁꽁 닫아놓았던 창문을 열어 가끔 봄바람을 맞아들인다. 가끔, 아직 쌀쌀한 기운에 얼른 어깨를 움츠리지만 말이다.

하지만 꽃이 피었기에, 마음까지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태양보다 붉은 꽃들이 어디서든 눈에 들어오니까. 게다가 그런 따뜻하고 아름다운 꽃이 바다에서도 피어남에야 겨울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통영 봄바다의 봄꽃, 멍게 이야기다.

통영·거제 양식 꽃 멍게가 전체 판매량의 70%
멍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은 종류가 있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그러니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분류하면 대략 세 종류다. 주당들의 술잔으로도 가끔 사용되는 돌 멍게와 동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양식되는 붉은 멍게, 그리고 통영을 중심으로 동남해안 일대에서 양식하고 있는 꽃 멍게가 바로 그것. 그중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꽃 멍게다. 전체 멍게 판매량 중 대략 70%가 통영과 거제에서 양식한 멍게들이 차지하고 있다 하니 횟집 등에서 맛보게 되는 멍게 대부분은 바로 ‘이 동네’에서 자란 것들이라 보면 크게 잘못된 인식은 아닐 것이다.

2 바다에서 건져온 멍게는 연안에서 즉시 손질한다 3 멍게는 겨울을 제외하고 연중 수확이 가능하기에 언제나 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4 김과 멍게, 참기름과 참깨만으로도 맛있는 비빔밥

그런데 멍게는 호불호가 굉장히 많이 갈리는 녀석이다. 향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멍게를 수확하기 전에 시장의 좌판을 차지하고 있는 굴 역시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의 선호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품목이지만, 멍게는 그보다 더 심하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멍게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어른들이 “한번 먹어봐”라며 강권하다시피 내 입에 밀어 넣은 주황색 멍게 살은 단순히 ‘비리다’고 할 수만은 없는 어떤 강한 향으로 입과 코를 온통 휘감았다. 게다가 그 고약한 향이 쉽게 가시지도 않았다. 어린아이에게는 그리 유쾌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 울룩불룩한 몸통에서 꺼낸 살만 보면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게 상책으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술을 마시게 된 후 멍게가 새롭게 보였다. 소주 안주로 이만한 것을 찾기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역시 술을 마신 지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그러니까 나름대로의 ‘주력(酒歷)’이 쌓인 후에 깨닫게 된 점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울에 살 때의 이야기였을 뿐 이곳 통영에서 그날 수확한 멍게를 먹어본 이후로는 또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에 이토록 바다의 향을 감미롭게 표현하는 해산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굴과 비교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까. 굴이 바다향기를 농축해 관능적인 맛을 자랑한다면, 멍게는 자신이 자라난 곳의 짜고 푸른 기운을 좀 더 발랄하고 싱그럽게 선사한다. 그러니 입안에서 느껴지는 풍미도 좀 더 적극적이고 선명하다. 기호에 있어서 그 간극이 넓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참기름·참깨·김가루 … 담백한 멍게 비빔밥
만약 “난 정말 멍게만큼은 못 먹겠어”라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에게 그나마 쉽게 멍게와 친숙해지는 방법을 소개하자면, 단연 멍게비빔밥이다. 말 그대로 멍게를 밥에 비벼먹는 것인데, 특이한 점은 고추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기를 빼 잘게 다져 얼려놓은 멍게에 참기름과 참깨, 김 가루만 뿌려 밥에 비벼먹는 멍게비빔밥은 여느 비빔밥과 전혀 다른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이 멍게비빔밥을 가장 먼저 먹기 시작한 곳은 거제. 그래서 거제에는 이곳저곳에 멍게비빔밥을 한다는 집이 참 많은데, 단골식당 사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통영에서는 5, 6년 전부터 먹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지금은 거제만큼이나 멍게비빔밥을 하는 집이 많아졌다.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를 노릇. 게다가 식당에 따라서는 전골을 만들거나 빵의 내용물로 사용하는 곳도 있을 정도다. 아마 관광객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스레 다양한 상품으로 발전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내가 먹어본 바로는, 멍게를 이용한 요리는 여전히 멍게비빔밥이 가장 맛있었다. 그러니 ‘멍게 초심자’에게도 추천하기 좋은 음식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멍게비빔밥에서 멍게의 자취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잘 비벼진 밥 한 숟갈을 입 안에 넣으면 금세 멍게 특유의 향이 미각과 후각을 일깨우는데, 자극적이지 않고 아련한 느낌이라 마음마저 푸근해진다. 물론 이 역시도 멍게에 대한 ‘극도의 혐오’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리한 일일 테니 만약 정말 멍게가 싫다면,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먹을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다만 봄바다를 즐기는 더 없이 좋은 방법 하나를 잃어버리는 아쉬움은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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