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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탄신 백주 특별 기고|「리지웨이」 장군·「알레이·버크」 제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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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리지웨이」장군>한국전이 심각한 국면에 처해있던 50년12월27일 나는 미 8군사령관으로서 이 박사를 처음 상면했다. 그는 『장군, 참으로 반갑소』라면서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이때부터 이 박사와 나와의 협조 관계가 시작 됐다.

<혹한 속 최전방 cp방문>
지체없이 진지를 구축해야할 필요성 때문에 나는 이 박사에게 노동자 3만명을 동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박사는 『장군, 언제 필요하오』라고 물었고 『내일 아침 당장 필요합니다』고 하자 이튿날 아침 1만명의 노동자를 진지 구축에 동원해주었다.
그해 12월31일 밤부터 시작된 공산군의 대공세로 전사자가 속출하여 나는 이 박사에게 나와 함께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의 용기를 북돋워 달라고 제의했다. 이 박사는 즉각 두루마기에 단화 차림으로 뼈끝까지 스며드는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불평 한마디 않고 최전방 부대CP를 방문, 장병들을 격려했다.
천막으로 덮개를 씌운 단발 경비행기를 타고 나와 헤어지면서 이 박사는 『장군 상심 마시오. 그들은 전보다 훨씬 잘 싸울 거요』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후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우리는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상황에 부닥쳤다.

<고집에 재한 외교관들 골치>
나는 이 박사에게 서울을 포기하고 떠나야겠으며 한강상의 유일한 공로인 한강 인도교가 다음날 하오 3시까지만 민간인 철수에 이용이 가능하고 그 이후엔 군용 이외엔 폐쇄된다고 통고했다.
이 박사로서는 수도 서울을 철수하는 것이 지극히 실망스러웠겠지만 나에게 단 한마디의 불만도 표시하지 않았다. 이 박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그러나 묵묵히 보좌관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두달 반 동안의 부산 피난 생활 후 연합군의 공세로 수도 서울이 탈환되자 이 박사는 압록강까지 밀고 가자고 나에게 압력을 가했다. 남북 통일이라는 이 박사의 필생의 집념을 꺾으려고 나와 「무초」 대사뿐 아니라 「워싱턴」에서까지 온갖 설득을 시도했었지만 그의 생각에는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때로는 미국이 조력하지 않는다면 한국군 단독으로라도 이 작업을 추진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이 박사의 무력통일 고집과 휴전 협상 재개 반대는 나와 나의 후임자들을 곤경에 몰아 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슴속에는 이 노인에 대해 경외감과 동정심만이 가득했다.
그는 국민을 위해서는 지나친 편견에 사로잡혀있었고 또 불가능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조국에 대한 그의 마음가짐은 사랑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감동을 주었다.
이 박사는 오직 조국을 위해 그의 전 망명 생활과 귀국 이후의 모든 순간들을 헌신해 왔던 것이다. 그의 내부에서 활활 타고 있던 자신의 희생과 격정을 생각하면 이 박사가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었겠는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 박사가 베풀어준 모든 조력에 감사하며 그의 명복을 거듭 빈다.

<「알레이·버크」제독>이 박사에 대한 인상은 그가 훌륭하고 성실한 지도자라는 점이다.
그와 가까이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정전위에서 백선엽 장군과 같이 일할 때였다. 하루는 백 장군이 나에게 같이 이 박사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때 내가 이 박사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이 박사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했다. 이 박사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강조하면서 모든 사태를 장기적으로 내다봤고 또 그것은 현명한 자세였다.
그 당시 이 박사는 휴전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전쟁의 양상이 우리에게 유리한 국면이었으므로 나 자신도 개인적으로는 휴전을 원치 않았다. 휴전 협상은 전투를 어렵게 만들었고 또 어느 누구도 최후의 전사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박사의 생각은 옳았다.

<만년에 인의 장막으로 실정>
그러나 미국 정부의 자세도 역시 옳았다. 이 박사는 자주 백 장군을 정전위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위협했고 그렇게 될 경우 미국 측은 한국 휴전을 성취시킬 수가 없었다.
이 박사는 그때 북진을 주장했는데 많은 사람은 압록강까지 진격하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양자택일의 생각은 모두 옳지 않았다. 실사 이박사의 주장대로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렇게되면 끝없는 전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휴전 협상 초기 수개월동안 우리는 당시의 전선을 휴전선으로 하자는 공산 측 제의를 거부했었다. 우리가 세 차례나 거부하자 「리지웨이」장군은 다시 수락을 명령했다. 우리는 이를 수락하기보다는 정전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그런 후 우리는 6개월만에 교체됐다.
나는 56년과 71년 두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나는 이 박사가 훌륭한 전시 지도자였다고 생각한다. 이 박사는 적재적소에 사람을 쓸 줄 아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만년에 이 박사는 주변의 보좌관들에 의한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사실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흔히 이 박사를 고집 센 노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당시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해야했던 이 박사로서는 고집이외에 달리 미국과 협상을 할 여지가 없었다.
이 박사는 겸손한 동양적 신사였다. 위대한 의사가 겸손하듯이 그는 지도자답게 의연한 자세를 지녔었다.

<차례>
①로버트·T·올리버 박사 (상) (중) (하)
④존·무초 전 주한 대사
⑤마크·클라크 장군
⑥매듀·리지웨이 장군 알레이·버크 제독
⑦ 맥스웰·테일러 장군
⑧ 월터·매카나기 전 대사 카터·매그루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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