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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불 아동심리학자 김양희 박사(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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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라오테」병원에서 3년을 일하면서 그는 토마티 박사와 부분적으로 견해가 다름을 내심 발견했다. 아마도 「토마티」박사는 의학분야이고 그는 심리학 분야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독자적인 언어교정방법과 이론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개인병원을 여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개업 2년 뒤 심리학 박사학위>
마침 말을 더듬는 「보르도」의대교수를 교정해 주었더니 그들은 「보르도」에 교정원 개원을 권고해 왔다. 그래 「보르드」에 가보았으나 마땅한 장소도 엄두를 낼 수가 없어 「파리」와 비교적 가까운「노르망디」지방의 중심지「루앙」을 택하기로 했다.
64년3월 그는 독불장군 격으로 병원을 열었다. 축하「파티」도 없는 쓸쓸한 개업이었고 환자들이 찾아 올까도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성패를 조금도 가름할 수 없어 부인은 「파리」의 직장을 지켜야만 했다. 그러나 개업 첫날 3명의 환자가 찾아왔다. 어린이를 심리치료 한다면 흔히 마술을 부리지 않나 두려워하기 쉽다. 그래서 말동무로부터 말공부를 시작, 심리치료를 했다. 차차 환자들이 늘어났다. 아동정신분열증 난독증(불 어린이의 10%가 이 환자이다)에 걸린 어린이들도 찾아 왔다. 차차 병원이 번창해서 불과 개업 3개월만에 방 5개 짜리 지금의 건물을 빌어 병원을 옮겼다. 1년 후엔 환자가 쇄도, 「소르본」대학 심리학과를 나온 후배를 조수로 둘만했다.
개업 2년 만인 66년이 되자 그는 부인에게 이제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루앙」에서 혼자 있는 2년 동안 연구를 계속해 「소르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말더듬이와 청각』이란 학위논문에서 그는 말더듬이의 원인은 자기 음성을 싫어하고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이며 말더듬이는 자기모습을 거울로 보기를 거부하게 되고 자기음성을 싫어하는 것은 듣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말로 재빨리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수강했다. 물론 「토마티」박사와 비슷한 이론이라 할 수 있으나 그는 자기이론이 더욱 발전된 이론이라고 자부하고있다.
박사학위를 받고, 병원이 번창하고, 그에게는 고생 끝에 낙이 찾아 왔다. 「파리」집을 팔고 돈을 더 보태서 세 들었던 60평 짜리 병원건물을 사들였다. 또 「프랑스」 심리학회 이사라는 명예직도 갖게 되었다.
그동안 철저히 해오던 가족계획을 풀어 69년엔 첫 아들을 얻었다.
이 무렵 그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다름 아닌 국적문제였다. 「프랑스」엔 사회보장 제도가 잘 되어 있어 그의 병원도 의료보험가입자를 무료로 치료해주고 국가에서 보상을 받아야 했다. 「프랑스」정부는 치료비를 지급할 때마다 국적문제를 거론했고 나중에는 「프랑스」인이 되어 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루앙」시청에 찾아가 상의를 해도 형식적으로라도 국적을 옮기라면서 「프랑스」정부는 외국인에게 국고를 지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1970년 그는 「프랑스」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마음만은 자손 대대로 한국인임에 틀림없습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동안 그가 귀국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시설만 서울에 옮기면 된다고 판단,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아직 실현을 보지 못했다.

<재불 20년만에 감격적인 귀국>
71년 그는 「두앙」교외에 20만「프랑」짜리 저택을 매입. 「프랑스」에서 완전히 기반을 굳혔다. 그해 8월엔 일본 동경에서 열린 국제심리학회에 「프랑스」대표로 참석, 이때 그의 세 가족은 꿈에 그리던 조국을 찾았다. 전쟁의 폐허를 보고 유학 길에 오른지 근20년만이었다. 그러나 김포공항에서 「프랑스」여권을 내밀고 입국절차를 할 때 그의 마음은 누구도 모를 고뇌로 가득 찼었다.
그가 요즘 치료하는 대상은 단순한 말더듬이 뿐 아니다. 음에 장애가 있는 저능아들, 난청 증, 언청이 발음, 입천장이 갈라지거나 치열이 나빠 발음이 잘 안 되는 어린이도 있다. 또 언어 장애로 말을 더듬는 어린이, 소아신경질, 아동정신분열증, 실어증, 난청증 등도 대상이 된다. 외부적으로 보아 정상적이나 글을 읽을 때면 공연히 더듬고 또 쓰지 못하는 어린이도 있다.
이같은 어린이들은 학교나 가정에서나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기 일쑤며 그래서 열등감이 생기고 교정을 못하면 평생을 불행하게 보내게 된다. 그가 개업 10년간 치료한 어린이만도 3천여 명에 달한다. 어린이는 6개월∼1년, 어른은 1년∼2년이 걸려야 치료가 된다. 물론 이때 병원의 치료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가정과 학교 또는 주위환경, 병원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교정은 가능하다고 한다.

<노르망디 한국고아를 돌봐>
그는 「프랑스」에 와 있는 고아들을 우선 돕기로 했다. 그는 세계의 불우아동을 돕는 기관인 「인간의 대지」에 이사로 들어갔다. 「노르망디」에 온 양자수가 현재 8백여명에 이르고 있는데 그중 반수가 한국고아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됐다. 이런 고아 중에는 정신장애자가 특히 많다는 것이다.
이런 고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번 9월에는 「루앙」의 「메디컬·센터」에 국제이민족 양자 과가 신설될 예정인데 그는 여기의 과장자리를 맡게 된다. 그는 또 「<인간의 대지」를 통해 각국의 주요 병원에 이같은 과를 설치하도록 교섭 중이다. 그가 바빠진다는 것은 한국에 보이지 않는 「플러스」가 될 것이 틀림없다. 뜻한 대로 조국에 와서 불우 어린이들을 위해 일할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조국을 무엇인가 일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만은 그에게서 역력히 읽을 수 있었다.
이 글은 한 교포의 성공담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독특한 나라에서 맨 주먹으로 큰 뜻을 펴 나가면서도 항상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지니고 있는 한인간의 생활투쟁기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일요일 오후 그의 응접실에서 일어서자 김양희 박사는 『홍규야, 아저씨에게 인사 드려라』하고 말했다. 한국인 2세 홍규 군은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하고 말하고는 기자에게 달려와 「프랑스」식으로 양쪽 뺨에 이별의 「뽀뽀」를 하는 것이었다. <파리=주섭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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