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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다시 불렀다 … 28년 공구 만든 60세 "기계와 여생 보낼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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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3일 인천 청천동 와이지원 본사에서 박삼석(60)씨가 6날짜리 엔드밀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다. 박씨는 “정년퇴직 후 다시 출근할 때까지 아내와 5박6일 달콤한 휴가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의 휴가 얘기는 시끄러운 기계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엔드밀에 대해 설명할 때 그의 목소리는 귀를 울리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김성룡 기자]

“비행기든 자동차든 이게 없으면 못 만듭니다.”

 지난 13일 인천 청천동의 절삭공구 제조업체 ‘와이지원’ 본사 공장. 남색 작업복과 청색 토시, 기름때 묻은 손가락, 오른쪽 가슴의 너덜너덜한 사원증…. 박삼석(60)씨는 인터뷰 내내 웃지 않았다.

체력도 청년 못잖아 … 회사와 윈윈

꽈배기 모양의 검지손가락만 한 절삭공구 엔드밀을 소개할 때는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엔드밀은 컴퓨터 수치제어(CNC) 선반으로 정밀하게 깎아서 만든다. “품질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게 기술이죠.”

 박씨는 32세에 입사해 28년 동안 엔드밀을 갈고 문지르고, 그렇게 공을 들였다. 그 덕분에 회사는 세계 생산량 1위로 우뚝 섰다. 박씨는 지난달 말 정년퇴직을 하고 10일 만에 다시 출근했다. 퇴직 전 급여의 70% 정도를 받고 1년씩 계약을 연장하는 조건이다. 박씨는 “평생 기술을 배워온 곳에서 일을 마치고 싶다”며 “회사가 나를 계속 인정해 준다면 엔드밀과 함께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 이제광 인사본부장은 “회사에서 60대는 한창 일할 나이”라며 “숙련도는 물론 체력까지 젊은이들 못지않아 윈윈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에는 박씨처럼 정년을 넘겨 일하는 6074가 6명 더 있다.

 젊은 노인 6074(60~74세)에게는 일이 곧 삶이었다. 일밖에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 이들에게 정년은 큰 의미가 없다. 다니던 곳에서 계속 일한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고용노동부 김윤태 고령사회인력정책과장은 “60세 정년 의무화를 앞두고 정년을 폐지 또는 연장하거나 퇴직자를 재고용하는 회사가 계속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일곱 번 재계약한 63세 엔지니어

 강은식(63)씨는 해마다 근로계약을 연장했다. 올해로 일곱 번째다. 인천 서구에 있는 자동차 정비기기 제조업체인 ‘헤스본’이 그의 회사다. 원래 정년은 56세다. 근로자가 원하면 정년 후 10년까지 더 다닐 수 있다. 2012년에 정년을 맞은 11명은 전원 재고용을 택했다. 강씨는 20년 동안 4t 이상의 차량을 들어올리는 리프트를 조립하고 테스트하는 일을 해 왔다. 강씨는 “품질관리 노하우는 젊은 세대가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악기용 목재를 만드는 천수종합목재는 4년여 전 65세 정년을 없앴다. 업종의 특성상 체력보다는 기술력과 노하우가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전체 직원(15명) 중 생산직이 10명인데, 이들 모두 60세가 넘었다. 이 분야에서 수십 년 넘게 일한 전문가가 아니면 원목을 제대로 다루기 힘들다. 김기동(64) 공장장은 “고기도 저 놀던 물이 좋다고 다들 신나게 일한다”며 웃었다.

직원 67%가 60세 이상인 기업도

 퇴직자들이 모여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시니어직능클럽이 그것이다. 25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건강보험심사평가원 1층 민원상담실. 서울 은평구에 사는 오상훈(67)씨가 “10여 년 전에 췌장암 수술을 받았고 2년마다 위와 장 검사를 해야 하는데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오씨를 맞은 상담원은 차재희(67·여)씨다. 차씨는 “진료비 확인 요청서를 작성하면 확인해 보겠다”고 응대했다. 상담이 끝나자 오씨는 “심평원 근무 경험이 많아서인지 이해하기가 쉬웠다”고 말했다. 차씨는 심평원에서 21년 근무한 베테랑. 이 회사 퇴직자로 구성된 시니어직능클럽 회원이다. 김윤홍(61)씨는 2년 전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자회사인 코레일네트웍스에서 정년을 마치고 퇴직 동료 200여 명과 시니어직능클럽을 열었다. 요즘은 ‘철도문화사’ 연구에 열중하고 있다. 철도의 역사와 특색 있는 역을 소개하는 지식 가이드 회사를 목표로 한다. 새로운 직업이다. 김씨는 “평생 직장에서 해 온 일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선임기자, 장주영·김혜미·정종문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시니어직능클럽=같은 회사·직종의 퇴직자 모임으로 보건복지부가 인증한다. 퇴직 전 기업과 연계해 일자리를 만들거나 자원봉사를 한다. 31개 클럽이 지난해 31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1인당 월 평균 117만원을 벌었다. 정부가 사무실을 여는 비용의 일부를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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