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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그 입지의 현장을 가다|반공포로출신 재인 실업인 지기철씨(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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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뉴델리=김동수 특파원】8·15 뒤 한 달이 채 못돼 한인 귀국 선을 가까스로 얻어 탈 수 있었던 지씨는 9월13일 생소하기만 한 부산 땅을 밟는다. 패전 뒤 흐지부지 풍지박산 돼 버린 부대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온 지씨에게 푼돈이나마 있을 턱이 없다.
어릴 적부터 말로만 들어오던 고향으로 가면 혹 가족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여겨 시골의 후한 인심 덕을 보며 예 천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난생 처음 친척들을 만나 보았다. 4촌과 외가식구들이 맞아 주었으나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봉천의 가족소식도 감감, 불길한 풍문만 들려 열흘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북행을 작정했다.

<동냥 반 날품 반으로 봉천 도착>
친척들이 추렴해 준 약간의 노자 돈을 쥐고 보따리를 꾸렸다. 개성 부근에서 38선을 넘을 때는 길 안내인에게 30원을 치러 버려 호주머니 사정은 감질날 지경. 평양을 거쳐 신의주에 이르니 압록강 양쪽에 소련군 초소가 있단다. 엿 한 근을 보초에게 주면 월경을 눈감아 준다는 소리에 마지막 남았던 몇 푼돈을 털어 두 근을 마련했다.
신통하게도 엿 두 근의「약효」는 즉효를 보였다. 만주의 안동에서부터는 동냥 반 날품 반으로 봉 천에 닿았다. 혼란기라 열차운행은 엉망이었으나 덕분에 승차권 파는 역도 없어 이따금. 화물차간을 공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게 요행이었다.
예천서 봉천까지 꼬박 여드레 길이었다. 전사 통지서와 유골까지 받았던 집에서는 처음 귀신이라도 들리는 것처럼 어리벙벙했다.
가족들과 어울린 지 한 달이 지났을까, 아들 6형제의 지씨 일가에 1명을 의용군에 내보내라는 할당이 돌아왔다. 임 표가 지휘하는 중공 제4야전군, 이른바 팔로군으로부터 날아든 소집영장이다.
지씨는 형 셋을 젖히고『내가 가겠다』고 나섰다. 「하르빈」까지 가서 팔로군휘하의 한인사단에 편입했다. 164,166 두 개의 한인사단 중 지씨가 배속된 사단은 제166사. 45년 11월의 일이다.
지씨의 부대는 그가 입대하자마자 국부 군에 밀려 모란 강 상류인 안도까지 쫓겨 남하한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장백의「흉악한」산골이다. 사흘 나흘 쫓기다 보면 잠을 못 자 산비탈을 기어오르며 조는 것은 예사. 허겁지겁 가슴까지 물이 차는 강을 건너고 나면 두툼한 속옷까지 금방 얼어붙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각거린다.
안전지대로 기어들 때까지 동사를 면하려면 30리고, 50리고 뜀박질하여 몸의 열기로 뻣뻣하게 굳어 드는 전신을 녹여야 한다. 46년 봄 중공군이 반격할 때까지 겪은 일이다.
처음 관동군 경력 덕분으로 부 분대장의 직책을 맡았던 지씨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번 승진을 거듭하여 1년 만인 46년11월 포병연대의 대대장 직을 맡는다.
전투능력도 높이 평가되었지만 부하를 다루는데도 「인자함」으로 감복시켜 제4야전군 사령관 임 표가 모범대대장으로 표창, 훈장을 보냈다. 스물 네 살 나던 해다.

<팔로군 한인들, 북괴군에 편입>
중공군이 중국을 모두 석권하고 난 49년 7월 동북 의용군이라는 이름의 2개 한인사단은 북괴 인민군에 편입되어 만주를 떠났다. 지씨가 몸을 담았던 166사는 신의주에 주둔, 제6사단으로 이름을 갈았다. 처음에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간다고 한껏 흐뭇했으나 신의주 생활 1주일만에 환멸을 맛보기 시작했다.
북괴 내무성(당시) 소속의 하급장교들이 거드럭거리며 괄시가 심한 것은 참을 수 있었으나 하루 8시간씩 사상교육이라고 꼼짝 못하게 붙잡아 두는데는 견딜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 도망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지씨가 가장 괴로워했던 것은 소 좌라는 계급장을 달았을 때다. 만주에 있을 때는 지휘계통에 따른 직분의 구별은 있었으나 계급장이 없었을 뿐더러 복장에 차이가 없었다. 계급장을 달고 나니 부하나 상관이나 만나기 싫어 며칠동안 자기 방에 틀어박혀 꼼짝 않았다. 격의 없이 지내다 갑자기 무슨 벽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단절된 상태에 놓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49년 12윌「지 소좌」는 군관학교로 보내져 정치교육을 받았다. 5개월20일 만인 50년 5월 초하루 귀대. 북괴 인민군 제6사단 포병연대 제3대대 대대장 자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형이 남한으로 탈출 권유>
부대는 그 동안 사리 원으로 이동하여 맹렬한 전투 훈련 중이었다. 귀대 후 50여일 간의 훈련을 끝내고 나니 부대이동명령이 내렸다. 개성 부근의 38선에 배치를 끝낸 것이 6월23일. 24일 지형경찰에 이어 25일 새벽의 남침까지 일사천리다.
전북 장수군 계내면 장계리까지 밀고 내려갔다. 그러나 「유엔」군의 반격과 함께 주춤,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며「지 소좌」는 귀순할 틈을 엿보기 시작한다.
『군관학교 가기 전인 47년 가을 평양에서 가형을 뵌 일이 있죠. 중국 본토서 일본군 통역하던 분으로 8년만에 만났습니다. 당시 청년단 관계 일을 보고 계셨는데 집으로 데려가더니 대뜸 남으로 넘어가라고 하더군요.』
지씨의 가형은 자신의 어려운 생활 형편이며 직장에서의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탈출을 권했다.
『북에서 간 사람은 모두 죽인다던데….』『절대로 그렇지 않다니까….』안 그래도 미심쩍은 생각으로 지내던 터에 형의 말을 듣고 난 뒤부터 지씨의 번 민이 시작된다. 이런 판에 전지에서만 굴러 오던 지씨에게 정치장교들의 감시와 횡포는 점점 반발심을 키워 언젠가는 탈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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