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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언론인·NGO 단체장 … 선비정신 필요한 ‘현대판 선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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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3호 14면

아산정책연구원의 선비정신 여론조사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부정 일변도로 봤던 선비정신을 적극 평가한다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방증이다. 특히 선비정신이 중요하다고 보는 이유로 ‘인격 수양’이 이념에 관계없이 보수·중도·진보 고르게 꼽힌 것은 ‘인격 수양이 덜된 사회’에 대한 실망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국회와 정치권의 막말, 노사 간의 극한 대결, 갈수록 떨어지는 예절 의식 같은 것들이 인격 수양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선비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해 주는 듯하다.

선비 연구학자 10인에게 물었더니

이에 중앙SUNDAY와 아산정책연구원 인문연구센터는 1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일반 여론조사와는 달리 심층적인 선비 탐사를 시도했다. 선비를 연구하는 학자 10명에게 선비가 갖춰야 할 덕목과 오늘날 선비정신을 가져야 할 직업군을 구체적으로 물었다. 오늘 같은 갈등 사회에서 선비의 어떤 가치를 되살려야 하며 옳음을 행하는 선비의 역할을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제시된 덕목은 1)박학(널리 배움), 2)심문(깊이 물음), 3)신사(신중히 생각함), 4)명변(사리 분별을 정확히 함), 5)독행(판단한 대로 독실히 행함), 6)의(대의명분), 7)지조, 8)겸손, 9)화(화합), 10)청렴, 11) 관용이었다.
이 가운데 선비의 중요한 덕목 5개를 꼽으라고 하자 10명 중 4명이 ‘의’를 1순위로 꼽았다. ‘신사’는 3명이었다. 1인당 5표를 행사할 수 있어 총 50개 항목을 꼽을 수 있었는데 그 결과도 비슷했다. 명변, 의, 지조가 각각 7표를 얻었다.

오늘날 선비의 덕목을 지녀야 하는 직업은 어떤 것들일까. 1)대통령, 2)장·차관 3)고위 공무원, 4)국회의원, 5)지자체장, 6)NGO 단체장, 7)교수, 8)언론인, 9)CEO를 제시하고 4개를 중요한 순서대로 선택하도록 했다. 7명이 1순위로 교수를 꼽았다. 2순위로는 4명이 언론인을, 3명이 장·차관과 NGO 단체장을 지목했다. 중요도 순서와 관계없이, 총 투표수만 보면 교수(8명), 언론인(7명), NGO 단체장(7명), 국회의원(5명), 장·차관급(5명) 순이었다. 이는 조선시대 선비상과 비슷하다. 조선시대 선비의 이미지가 공부하고 옳은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약간 분리돼 학자는 공부를 하고 언론은 조선시대 대간이 했던 비판 역할을 한다. NGO 단체장도 사회 문제를 찾아내 해결하는 비판 기능을 하기 때문에 교수들이 선비로 꼽은 것으로 보인다. 국회의원과 장·차관에 선비의 역할 기대가 떨어진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대통령에게도 선비 역할을 거의 기대하지 않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이어 각 직업에서 어떤 덕목이 부족한지 묻자 선비정신을 기대하는 교수, NGO 단체장, 언론인에 대한 지적이 가장 많았다. 의, 신사, 지조, 청렴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교수의 경우 ‘심문’과 ‘의’, 신사, 명변, 독행, 지조, 청렴, 관용, 신(新·새로움) 등 무려 아홉 가지나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학문 탐구는 묻고 답하는 과정. 그런데 이를 업으로 삼는 교수들이, 교수에게 ‘깊은 물음이 부족하다’고 비판한 것이다. 대학이 본래 목적인 학문탐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편엔 교수직을 발판 삼아 정치에 나서는 폴리페서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일 수 있겠다.

NGO 단체장에겐 화(和)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3표 나왔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자기 주장만 내세우지 말고 합의와 공감대를 만드는 데 더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언론인의 경우에는 심문·명변·의가 2표씩 나왔다. 복잡한 사안을 정확히 분별하고, 이면을 취재해 진실을 찾아내며 궁극적으로 ‘의’를 추구하라는 주문이다. 서로 다른 주장만 난무한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운 오늘날 사회에서 언론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반대로 위의 9가지 직업 중 선비 덕목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직업이 무엇인지 묻자, 4명이 CEO를 꼽았다. 이는 경제인이 이윤 추구를 하기 때문에 다른 덕목을 요구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한편 1000명 대상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다른 결과는 아래와 같다.

▶선비정신이 현재 정치권에 미친 영향에 대해 긍정 35.3%, 부정 32.1%로 나타났다.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의견은 진보(32.6%), 중도(33.8%), 보수(43.1%) 순으로 늘었지만 부정적이라는 의견은 진보(36.0%), 중도(34.9%), 보수(30.3%) 순으로 낮아졌다.

▶선비정신이 경제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데도 “그렇다”가 52.9%로 “그렇지 않다” (29.6%)를 훨씬 앞섰다.

▶선비정신이 한국의 사회통합에 기여할 것이냐에 대해 “그렇다”는 55.7%, “부정적”은 24.8%로 나왔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4색당파로 나뉘어 정치적 갈등을 벌였다는 통념과는 다른 결과다.



◆의견 주신 분들
곽신환(숭실대 철학과), 김경희(성신여대 교양대학), 박성우(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배병삼(영산대 교양학부), 서현(한양대 건축학과), 이남희(원광대 한국문화학과), 이병택(경희대 공공거브넌스센터), 이원택(동북아역사재단), 이형성(전주대 사범대학), 허동현(경희대 교양학부)



취재지원: 김보아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원, 임보미 아산정책연구원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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