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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헐뜯고 불신하는 세태…마음의 여유·아량 아쉽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입춘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추위는 좀체로 가시지 않고 사람의 마음마저 꽁꽁 얼어붙게 하고 있다.
눈이 대지를 푹 덮을 정도로 와 주었으면 마음이라도 한결 포근할 터인데 금년에는 천기마저 인간세계를 외면했는지 산이고 들이고 지붕이고 스산하기 짝이 없다.
자연의 법칙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사도 왜 그리 사람 사는 곳치고는 너무 황량한지 모르겠다. 서로들 남의 흠집을 잡아뜯고 꼬치꼬치 캐고 남을 나무라고 헐뜯고 비방만 일삼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젊은이의 발언이란 것을 보아도 기성세대가 틀려먹었느니 자기네들 세대를 이해해주지 못하느니 하는 불만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비난조이다. 늙은 축은 늙은 축대로 너희 놈들 만날 고고 춤이나 추고 돌아다니니 호텔에서 비명에 쓰러지는 것도 고소하다고는 생각 안 하나, 죄는 마땅히 받아야한다고 하는 축도 있다.
매일같이 각 신문에 나는 학자 님들의 짧은 글을 보아도 점잖은 욕지거리가 아니면 불만들이 대부분이다. 나 자신도 때로는 나를 길러내고 키워준 조국이지만 등을 지고 어디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렸으면 하는 심정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잘나도 내나 라요 못나도 우리 가난한 백성들이 옹기종기 사는 땅인데 하는 어설픈 애국심에 떠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나라에 간들 속은 더 썩을 것이라고 부질없는 위안을 삼고 있다.
젊은 세대고 장년 측이고 주장하는바가 다 그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 것이고 어느 만이 옳다고는 볼 수 없으니 그들의 행동이 남에게 어떤 해독을 끼치거나 사회질서를 크게 문란시키는 것이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도리어 상책이고 효과적이다.
장발 즉 머리 깎는 것도 그렇다. 구태여 붙들어다가 억지로 자르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보기 싫은 사람은 안보면 될 것이고 어느 시기가 지나면 제멋에 지쳐 스스로 돌아설 날이 오는 것이 유행이 아닌가한다. 스커트가 짧다고 순경아저씨가 자로 재는 것도 우스꽝스런 일이며 만홧거리 밖에는 안 된다.
재판만 해도 그렇다. 대법원 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재판소인데 판결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할 때가 가끔 있다. 제3자가 이렇다 저렇다 논의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법도 판결도 따지고 보면 하나의 상식이다. 판결이란 건전한 판단력을 가긴 사람에게도 수긍이 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옛날 이야기 하나 하겠다. 일본이 제정 러시아와 전쟁을 하기 전 그 나라 황태자가 일본에 관광차 왔다가 경도근처에서 일본 청년에게 칼에 찔린 사고가·일어났었다. 작은 나라인 일본은 러시아의 비위를 거스를까보아 겁이 나서 그 청년을 일본 황족에 대한 위해로 간주하고 엄벌에 처하라고 당시의 고지마 라는 대심원 장에게 부탁했지만 그는 이를 듣지 않고 보통사람에 대한 살인미수로 판결을 했다. 이로써 일본 사법권의 독립이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학교에 다닐 때 들었다.
대법관이라고 백성들은 그렇게 우러러보지 않는다. 그저 직업상 그 직에 종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고 얕보는 것도 아니지만 양심과 소신대로 하면 되지 연임에 떨어져 나갈 때까지 벌벌떨 필요는 없다. 떨어져서 개업이라도 하면 생활은 오히려 윤택해질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으면 하루도 못산다. 아내가 화장을 하고 시장바구니를 들고 나가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장에 가는체하고 댄스·홀에 들어가 어느 남자하고 춤이라도 추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 의심할수록 한이 없다. 아내는 남편이 대폿집에서 젓가락이나 두드리며 술을 마신다면 무방하지만 어떤 여자를 끌고 호텔 에 들어가 꿍꿍이 짓이나 하지 않나 생각하면 안절부절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에 매일 아침 안심하고 집을 나오고 또 내보내고 있다.
집에서 들으니 가끔 이웃 아줌마에게서 돈 있거든 잠시좀 빌려 달라고 한단다. 적은 돈을 없다고 할 수 없어 약간 빌려주면 그리 많지도 않은 돈인데 이자를 꼭꼭 부쳐서 기일 안에 가져온단다. 돈놀이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자 같은 것 왜 받느냐고 나무라면 아내는 억지로 맡기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 고한다.
여인들은 이자 몇 푼 받는 것에 만족감을 갖는 모양이다. 자기가 직접 노동이라도 해서 번줄 착각을 하고 두부 한모값 벌었다 꽁치 두마리값 공짜로 생겼다고 좋아한다.
이런 주부가 요사이는 규모있게 살림 잘하는 현대주부라고 생각되고들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너무들 똑똑한 것이 탈인 것 같다.
찰즈·램이이 『엘리아 수필』에서 『나는 진심으로 바보가 제일 좋아요 하는 구절이 나온다. 꼬집어 한말이 아니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사귀고 겪고 난 뒤에 얻은 결론이요 술회이다. 솔직하고 정직하고 인간다운 따스한 점이 있는 사람이란 대개 세상사람들에게서 바보로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예로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 돈을 맡기었더니 늘릴 줄 모르고 정직하게 간직했다가 받은 돈 그대로 돌려준 사람, 신랑을 맞이하는데 등잔불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의 예를 들고 있지만 도리어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들은인간답고 정다운 친밀감을 느낀다.
옛날에는 그렇지도 않았는데, 지나치게 똑똑한 것이 요사이는 극에 달해 조급함마저 가속화되어 우물에서 숭늉 달라는 격이다.
하루라도 인간답게 살려면 집에서 화분 하나라도 키워보고 붕어나 토끼라도 기르거나 찻종하나 파이프 하나라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면 마음은 가라앉는다. 텔리비젼이 앞에서 매일 울고 짜는 연속극이나 탐정극 같은 것 보지 말고 청산리 벽계수를 부르거나 바흐 혹은 모차르트의 클레식 이라도 듣는 것이 좋다. 돈 없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하루 담배 한 갑, 코피 한잔 아끼면 가능하다.
인간다운 마음의 여유와 아량이 무엇보다 아쉽다. 【윤태림】

<필자양력>
경남대학 학장(철학박사)
▲1908년 서울출생
▲경성제대문과 및 법과 졸업, 미 피바디 대 수학(심리학전공)
▲서울대사대학장, 문교차관, 숙대총장, 여세대 대학 대학원장역임
▲저서는 심리학입문 심리학개론 청년심리학 한국인에 성격 의식구조상으로 본 한국인 등
▲마산시 장군동4가 21의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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