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부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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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5백년전의 여인초상화가 처음으로 순천에서 발견되어 문화재로 신고되었다. 그러나 학계의 일각에서는 이 소식을 조심스레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조 초의 여인 초상화로는 일본 천리대에 소장돼있는 하연 부인상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반신상이다.
이번에 발견된 소주부인상은 세로 1m50㎝나되는 전신상이다.
만약에 이것이 원화에 틀림없다면 매우 값진 문화재가 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는 여인초상화란 극히 드물다. 기록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고려말에 공민왕이 그렸다는 노국대장 공주 진이 있다. 물론 지금은 남아 있지도 않다.
우리나라의 옛 화가들은 대체로 초상화를 즐겨 그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까닭은 짐작 할만도 하다.
초상화의 양식이나 목적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그렇긴 하지만 그것이 외면적·육체적인 사실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변함이 없다.
그러나 동양미술의 특색은 그 사실성 보다도 주관성에 있었다.
서양만큼 동양에 초상화가 흔하지 않은 것도 이런데 까닭이 있을 듯도 하다
물론 고 승상들은 흔하다. 그것은 미술품이라기보다도 종교적 예배물이거나 추념의 뜻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또는 옛 시인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그림들도 적지 않게 있기는 하다. 그것들도 어느 특정 인물의 개성묘사에 중점을 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독특한 문학적인 한 표현의 방식으로서 나타난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임금의 초상화도 드문 형편이다. 서양에서 초상화가 임금들의 영광을 오래 남겨두기 위해 발달했던 사실과 견주어 볼 때 이것은 자못 기리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임금은 어디까지나 신비스러워야 했다. 또 화인들의「모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민왕은 개울을 들여다보며 자상화를 즐겨 그렸다는 얘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기로 즐겼을 뿐이다. 그 작품들을 남겨 놓을 생각은 없었다.
임금보다 더 그리기 어려웠던 것이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여인이란 윤중 깊이 들어앉은 존재였다. 지체가 높은 여인 일 수록 더욱 화가들이 접근하기가 어려웠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였는지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과 같은 여류 서화 인들도 여인상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이번에 발견된 소주부인상은 매우 희귀한 작품이 된다. 아직은 누가 그 그림을 그렸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서 소주부인상을 그리게 되었을까 하는 일이다. 물론 그림을 떠난 얘기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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