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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규연의 시시각각

경주 참사, 폭설이 유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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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연
이규연 기자 중앙일보 탐사기획국장
이규연
논설위원

당신은 리더다. 어떤 결단을 앞두고 있다. 최상·최적의 시나리오와 함께 최악의 시나리오도 예측해야 실패를 줄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세 가지로 충분할까. 현대사회의 복잡성은 “노(No)!”라고 말하게 한다. 우리는 종종 최악 너머의 극한상황에 직면한다. 바닥까지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 아래 지하실이 있다. 발생 확률은 아주 낮지만 한번 발생하면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 바로 ‘익스트림(X)-이벤트’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그랬다. 1970년대 건설 당시, 일본 정부는 지질을 조사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유사 이래 이 지역에 높이 9m 이상의 해일이 온 적이 없다. 최악의 상황에도 견디게 10m의 방벽을 쌓자’. 상식적 선택은 대지진에 박살이 난다. 14m의 해일이 원전을 덮쳤다. 예상을 뛰어넘는 파국적인 상황, X-이벤트가 왔다.

 경주 리조트 참사는 X-이벤트였을까. 폭설(暴雪)만 보면 그렇다. 천년 고도 경주는 눈이 잘 오지 않는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일주일 동안 50~60cm의 눈이 내렸다. 지역의 건축기준은 30cm의 적설량에 견디도록 정해져 있었다. 기준을 넘어서는 기록적인 폭설이 다른 인재와 합쳐져 X-이벤트를 일으켰다. 리조트 관계자는 사고원인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규정대로 했는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노라고. 샌드위치 패널 지붕에 쌓인 눈이 유죄라는 말로 들린다.

 지구촌에서 X-이벤트는 잦아지는 추세다. 2008년 금융위기, 2009년 신종플루 대유행, 2013년 해킹 대란을 보라. 느닷없이 금융시스템이 무너지고 치명적 역병이 나돌며 바이러스에 의해 공공기관이 마비된다. 우악스러운 홍수·태풍이 태국·필리핀을 강타한다. 한 나라의 위기가 다른 나라로 금방 옮겨붙는다. 그렇지만 고체적 개념은 아니다. 그 사회의 역량에 따라 위험이 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한다. 관련 연구자(과학기술정책연구원 윤정현 연구원)는 X-이벤트의 촉진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기후변화와 글로벌화, 네트워크화다.

 X-이벤트를 100% 예방할 길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대참사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파국 전에 위험을 알리는 수많은 ‘약한 신호’가 생겨난다. 후쿠시마 재앙에 앞서 일본 열도에는 크고 작은 지진이 빈발했다. 경주 참사 일주일 전만 해도 그랬다. 인접한 울산에서 비슷한 지붕 붕괴 사고가 발생했다. 그때도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더 길게 보면 2000년대 들어 남해안의 폭설 빈도는 두 배로 뛰기도 했다. 이를 개인과 기업, 정부는 무시했다.

  ‘강소국’ 핀란드가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대표기업 노키아의 몰락이 겹쳤다. GDP가 8% 이상 뒷걸음쳤다. 이에 핀란드 정부는 2009년 ‘인류사회의 X-이벤트’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발생 확률은 아주 낮지만 한번 발생하면 파급력이 큰 사안을 찾아내 방책을 세우려 했다. 프로젝트팀은 일곱 가지를 선정한다. 유럽 통화 붕괴, 경쟁 기업의 노키아 인수, 중국의 저성장, 펄프·제지 산업의 해외 이전, 에너지 가격 폭락, 인터넷망 마비, 대홍수·가뭄 발생 등이다. 사안별로 대안을 만들었다.

 X-이벤트 면에서 핀란드와 한국은 닮은꼴이다. 경제개방도가 높고 기후변화가 심한 초(超)네트워크 사회다. 경주 참사는 우리의 취약점을 노출했다. 개인이든, 기업·정부든 극단적인 상황을 내다보는 시야를 키워야 한다. 약한 신호를 잡아내는 사회적 더듬이가 돋아나야 한다. 바닥 아래 지하실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X-이벤트 시나리오’도 한 번쯤 짜야 한다. 모든 극단적 상황에 대비해 돈을 쓰고 제도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 X-이벤트를 머릿속에 넣어두는 것만으로도 재난 대응력·복원력은 나아진다. 지붕에 쌓인 폭설을 털어내고 비상통로를 확보해 둘 줄은 알게 된다. X-이벤트는 곧 또, 반드시 온다.

이규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