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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 「중앙 문예」 당선 희곡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갑남 흘러 가버린 시간?
을남 그렇소!
갑남 어떻게 붙잡을 수 있소?
을남 그러니까 발버둥치잖소!
갑남 (뜻을 몰라 멍청해 있다가) 발버둥친다고 붙잡을 수 있겠소?
을남 또 발버둥치는 거죠.
갑남 뭘 잡는다고 했소?
을남 시간! 세월이라고 해도 좋소!
갑남 난 소리를 잡으러 왔소?
을남 저건 어떻소?
갑남 함부로 날 놀릴 거요? 고기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아니잖소!
을남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저 소리를 들으며 아름다운 꿈을 키워 갔댔죠?
갑남 왜 하필이면 할머니를 생각하오? 선생이라고 자처하는 양반이 애들을 생각 않고‥.
을남 그러니까 발버둥을 치는 소리라고 했잖소! 흘러간 시간을 붙잡아두려고!
갑남 아! 어머니가 생각나는군요. 저건… 저건 어머니를 생각케 하는 소리요!
을남 고향이 그립소?
갑남 (경건하게) 어머니….
을남 빨리 돌아가시오!
갑남 어디로 돌아가란 말입니까?
을남 고향으로! 당신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 말이오!
갑남 에끼, 여보시오!
을남 (영문을 몰라 무춤해 있다가) 갑자기 왜 야단이시오?
갑남 죽이고 싶거든 이 목을 누르시오!
을남 언제 당신을 죽인다고 했소?
갑남 그럼 왜 말을 함부로 하는 거요?
을남 난 당신 고향으로 돌아가란 말밖에 안 했소.
갑남 (슬퍼지며) 어머닌… 어머닌 벌써 돌아가셨단 말요!
을남 아, 그랬었군‥
방망이 소리가 뚝 그친다.
갑남 어릴 때였소. 다듬이질을 하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도 방망일 두드려보겠다고 치근거리다가 그만 손가락을 친 적이 있었소.
을남 쓰라린 추억을 갖고 계시구먼.
갑남 그래서 난…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하고 손가락을 생각하는 거요. 아, 그쳤소. 안 들리죠?
을남 이젠 끝났소! 내려오시오!
갑남 끝났다니? 이제부터 시작이오!
을남 역시 그 말이 그 말 아니오?
갑남 그 말이 그 말이라니? 혼동을 하고 있군!
을남 인생은 순간의 연속이란 걸 아시오?
갑남 영겁의 토막이란 것도 알고 있고.
을남 인생은 끝남과 시작의 연속. 이 순간 우리는 뭔가 하날 끝내자마자 다시 시작하는 거요. 그런데 이상하단 말요.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끝장이 나는 예가 있으니….
갑남 뭔가 단단히 혼돈을 하고 있군!
을남 그것이 타인의 방해로 말미암은 경우일 때는 더욱 억울하단 말요.
갑남 톡톡히 당했던 모양이죠?
을남 지금 이 순간도 당하고 있소!
갑남 쓸개 빠진 양반! 어서 가서 당장 발등의 불이나 끄시오. 꺼! 괜히 옆에서 귀찮게 굴지 말고!
을남 내려오시오!
갑남 아, 어서 가라니까! 가서 당신을 방해하는 놈의 아구통이나 냅다 갈겨버리시오!
을남 후회하지 않겠소?
갑남 속 시원히 때려눕히시오!
을남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잖소!
갑남 날보고 묻는 거요?
을남 내 주먹 한방이면 당신은 이 밑으로 거꾸러지고 말테니 후회는 마시오!
을남이 한 계단 올라서자 역시 미끄름 대가 흔들 한다. 갑남, 아연 질색을 한다.
갑남 올라오지 마시오! 아니, 갑자기… 날 어쩌겠다는 거요?
을남 날 방해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란 말이오!
갑남 뭐라구요? 난 당신과는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잖소?
을남 있소!
갑남 없다니까!
을남 뻔뻔스럽긴! 소리개 까치집 빼앗듯 냉큼 올라앉아서는…. (하며 한 계단 더 오르려고 한다)
갑남 (재빨리 팔꿈치를 괴고 엎드리며) 위험한 행동은 삼가시오, 제발! 당신마저 올라오면 이 미끄럼틀이 무너지지 않겠소?
을남 (할 수 없이 도로 내려온다. 혼자 소리로) 이걸 어떡헌다…? (잠시 망설이다가 종 있는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더니 홱 돌아서서 갑남을 흘겨본다)
갑남 이번에는 한번 멋들어지게 잘 쳐보시오. 정성을 들여서 부드럽게, 부드럽게…. 애들이 와야 잖소.
을남 (다시 미끄럼틀로 돌아온다)
갑남 왜? 자신이 없어?
을남 당신, 아무래도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 같소 그려.
갑남 때론 헛수고도 보람이 있는 거요.
을남 여기서는 물고기들이 속삭이는 소릴 들을 수 없소!
갑남 내가 속아 넘어 갈 것 같소? 역시 선생이 아니시군.
을남 애들이 오면 알 것 아뇨?
갑남 그러니까 다시 종을 치란 말이오!
을남 온다니까!
갑남 당신 스스로 선생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왠 거짓말을 그렇게 하시오?
을남 두고 보시오!
갑남 이제 그만 다툽시다. 당신 때문에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오. 당신이 없었더라면 그 소릴 벌써 들었을지도 모르겠소.
을남 누가 할 소리요?
갑남 난 당신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단 말요!
을남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기득권은 내게 있소!
갑남 기득권?
을남 그 자린 내 자리요!
갑남 여기가 당신 놀이터요? 핫 하하, 웃기지 마시오! 애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을남 (역정을 내며) 하필이면 이때 당신이 나타나서 나를 애태울게 뭐요?
갑남 그 기득권이란 말 한번 잘 했소이다. 보다시피 이렇게 내가 앉아 있는 이상 여긴 내 차지요.
을남 오늘이… 만 일년 째가 되는 날이오!
갑남 일년 전에 이 섬에 왔더랬소?
을남 이년 전에 왔소!
갑남 여보시오! 말을 이랬다 저랬다…일년이라고 했잖소?
을남 (서성거리며 허공을 향해 씹어뱉듯) 자릴 찾느라고 일년, 바다를 내려다보며 일년….
갑남 바다를 내려다보며?
을남 (한탄) 결국 당신이 나를 망치고 마는 구료.
갑남 날 원망하지 마시오!
을남 원망 않게 됐소?
갑남 허허! 괜히 사람을 덮어씌우려고…. 어디, 속 시원히 이야길 해보시오. 날 원망하는 이유가 뭐요?
을남 말해야 소용없소. 당신은 어차피 내 편이 아닌 걸….
갑남 허긴 그 말이 옳소. 동정을 바라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으니까?
을남 당신, 끝내 나하고 겨뤄볼 참요?
갑남 뭐 내기거리라도 생겼소?
을남 자릴 찾느라고 일년, 바다를 내려다보며 일년, 결국 이년이나 걸렸소! 그런데도 내가 쉽사리 물러날 것 같소?
갑남 뭣 때문이었소?
을남 바다가 저렇게… 일년 동안이나 지켜봤지만 오늘처럼 미동도 않는 바다는 처음 봤소. (무심코) 저렇게 바다가 잔잔한걸 보니 그 소린 꼭 들리고 말거요….
갑남 예?
을남 (아차, 말을 잘못했다 싶어) 아, 아니오! 들리지 않을 거요!
갑남 당신 금방 뭐라고 했소?
을남 파도 소리가 들린다고 했소.
갑남 저렇게 바다가 잔잔한데 파도는 무슨 파도요?
을남 안 들리오? 그 주제에 고기가 속삭이는 소릴 듣겠다고? 가소롭소, 가소로워!
갑남 빈정대지 마시오! 결과를 봐야 잖소?
을남 (타이르듯) 이제 그만 내려 오시요. 그렇게 죽치고 앉아 있어봤자 백년하청이오.
갑남 날 끄집어내리고 당신이 올라앉으려는 그 심보를 모를 줄 아오? 어림도 없어요, 어림도 없어!
을남 가서 우리 술이나 한잔합시다.
갑남 난 타협을 모르는 성미요. 헌데 당신은 뭣 때문에 이년동안….
을남 알고 싶소?
갑남 구태여 남의 일을 알 필욘 없지만….
을남 (결연히) 소릴 찾고 있는 거요!
갑남 (저으기 놀라 을남을 쳐다볼 뿐)
을남 알았으면 순순히 내려오시오!
갑남 (넋빠진 사람처럼) 어머니….
을남 당신도 가슴이 콱콱 막힐 땐 어머니를 부르는 버릇이 있구먼?
갑남 어머니가 계시오?
을남 어머니 없이 태어난 사람 봤소? 당신은 삼촌을 가장 존경한다고 했지만 난…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오. 어머닌 계속해서 딸 일곱을 낳으셨소. 여덟번째 애를 뱄을 땐 끊어버릴까 끊어버릴까 몇 번이나 별렀다지 뭐요. 그렇게 가까스로 태어난게 바로…
갑남 당신이었구먼….
을남 운이 좋았다고 할까….
갑남 그만 끊어버릴 걸!
을남 (발끈하여) 뭐요?
을남의 날카로운 시선이 갑남의 얼굴을 훑는다. 갑남, 슬몃 돌아앉으며 외면한다. 그것이 더욱 을남의 신경을 건드리는 결과가 된다.
을남 (버럭) 내려 오시소!
갑남 (아예 응수를 않는다)
을남 (한 계단 발딱 올라서며) 정말 안 내려오겠소?
갑남 (미끄럼틀이 흔들하자 역시 겁을 내며) 이거, 이러지 마시오, 제발... 빨리 종을 치시오. 애들이 와야 당신이 선생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거 아니오?
을남 애들이 오기 전에 당신을 끌어내리고야 말겠소! (하며 한 계단 더 올라선다)
갑남 올라오지 마시오!
을남 내려오라니까!
갑남 질서를 지킵시다, 질서를! 애들도 질서를 지키는데….
을남, 다시 한 계단 올라서서 손을 뻗어 갑남의 발을 붙잡으려고 하자 얼른 뒤로 물러나는 갑남. 미끄럼틀이 한바탕 요동을 하다가 겨우 멎는다.
갑남 당신, 정말 선생이 아니구료!
을남 애들한테 물어보시오!
갑남 그러니까 어서 내려가서 다시 종을 치시오.
을남 곧 올거요! (하며 다시 한 계단)
갑남 (미끄럼틀이 더욱 심하게 요동을 하자 발발 떨다가 궁둥이를 미적미적 끌며 물러난다) 앙큼스런 기집애?
을남 기집애?
갑남 당신의 그 심술부리는 꼴을 보니 마침 생각이 나는 구료.
을남 실연을 했군!
갑남 어느 날 삼십층이나 되는 계단 위에서 기다렸소. 약속 시간이 지나도 너그러이 기다려주는 아량을 베풀었죠. 드디어 한 시간이나 늦어서 나타난 기집애...
을남 뺨이라도 갈겼소?
갑남 천, 천만에. 나와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맙소. 덥석 손을 잡았죠.
을남 병신같이! 그럴 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는 거요! 때론 여자를 매정하게 다뤄야 되거든!
갑남 당신은 여학생을 그렇게 다루오? 앗 참, 당신은 선생이 아닐지도 몰라‥
을남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그래 어떻게 됐소?
갑남 대뜸 절교를 선언합디다. 그리곤 팽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더군요. 난 애를 썼소. 그 기집애를 계단 아래로 와락 밀어 뜨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고 무척 애를 썼소.
을남 당신은 그때 비로소 남자가 된거요!
갑남 그 기집애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땐 마치… 이 미끄럼틀 위에서처럼 내가 서있던 자리가 흔들거렸소.
을남 술이 취했던가…. (하며 또 한 계단)
갑남 (엎드리며 애원) 그만! 그만! 올라오지 마시오! 정말 나를 죽일 참요?
을남 당신을 죽여야 내가 사는 거요!
갑남 아니오! 아니오! 더 이상 올라오면 당신도…당신도 죽고 마오!
을남 당신 때문에 어차피 그 소릴 못들을 바에야 오히려…. 자, 아직 때는 늦지 않소. 이래도 버티고 있겠소?
갑남 (탄식) 아…. 어머니…
순간, 냉큼 뛰어올라 갑남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기는 을남. 그러나 갑남은 납작 엎드려 미끄럼틀의 가장 자리를 불잡고 떨어지질 않는다. 미끄럼틀이 심하게 요동을 한다.
갑남 여보시오! 이, 이러지 마시오! 미끄럼틀이 넘어지잖소…. 제발…제발 이거 놓으시오!
을남, 갑남의 어깨를 놓더니 이번엔 발을 잡고 왁살스럽게 당기기 시작한다.
갑남 사, 사람…사람 죽겠소. 아이구. 어머니…. 제엔장, 사람을 이렇게… 당신 미, 미쳤소?
이때, 아이가 왼쪽에서 들어온다. 장난감 나팔과 큼직한 고기를 한 마리 들고 있다. 두 사람의 실랑이를 보곤 눈이 동그래진다. 급히 종 있는 쪽으로 뛰어간다.
아이 (팔딱 뛰어 종을 치곤 무대 밖을 향해 외친다) 애들아! 미끄럼틀이 넘어진다! 미끄럼틀이 넘어진다! (또 종을 치곤) 애들아! 미끄럼틀이 넘어진다! 애들아!
두 사람, 종소리와 아이가 외치는 소리에 얼른 떨어져 앉아 멀거니 아이를 바라본다.
아이 (손을 모아 입에 대고 더욱 크게) 애들아! 미끄럼틀이 넘어진다! 애들아! 미끄럼틀이 넘어진다.
을남 퍼뜩 경신이 든 듯 급히 쥐어 내려오더니 미끄럼틀의 받침대를 잡고 버틴다. 갑남도 부리나케 뒤따라 내려와 을남의 반대쪽에서 받침대를 붙들고 버틴다.
을남 힘껏 버티시오! 미끄럼틀이 넘어지잖소!
갑남 힘껏 버티시오! 미끄럼틀이 넘어가고 있소!
을남 이게 넘어지면 우린 그 소릴 못 듣는 거요?
갑남 그땐 우린 끝장이오! 힘껏 버티시오!
아이 (다시 팔딱 뛰어 종을 치곤) 애들아! 미끄럼틀이 넘어진다니까!
두 사람, 사력을 다해 버티느라고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아이가 더욱 높이 뛰어 더욱 크게 종을 친다. -막-

<주소 경남 충무시 동호동 271의 3·나이 34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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