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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도진 정치권의 수퍼 갑 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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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박용석 기자 중앙일보 화백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김기찬
경제부문 선임기자

정치권이 또 끼어들었다. 고용현안에 대해서다. 이번에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다. 환노위는 14일 ‘노사정 사회적 논의 촉진을 위한 소위원회’ 구성을 기습적으로 의결했다. 사전에 노사정 간의 논의조차 없던 안건이다. 그 자리에 있던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이 놀라 정부 의견을 말하려 했지만 제지당했다. 그러곤 신계륜 환노위원장의 의사봉이 울렸다. 고용부도 국회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다. 고용부 관계자는 “노사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일수록 정치색을 빼고, 자율적으로 대화해서 접점을 찾는데…”라며 “정치권이 나서면서 고용현안이란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방 장관이 “노사정위원회에서 논의하는 것이 맞다”고 환노위에 읍소했지만 이미 물 건너간 뒤였다. 소위의 구성 멤버로 적시된 한국경영자총협회도 마찬가지다. 경총 관계자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뒤 ‘부르면 오라’는 것이냐”며 허탈해했다.

 국회 환노위가 소위를 구성한 명분은 그럴듯하다. “통상임금, 정년연장에 따른 후속조치, 근로시간 단축과 같은 노동현안에 대한 노사정 소통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노사정 소통을 얘기하면서 당사자인 정부와 경영계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경영계와 정부에서 “정치권에 또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노동계는 비교적 잠잠하다. 특히 한국노총이 그렇다. 왜 일까? 국회 관계자가 그 배경을 설명했다. “소위 구성은 이달 4일 한국노총 측이 한국노총 출신 김성태 의원에게 부탁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정부가 사과하지 않으면 대화는 없다”고 선언한 한국노총 입장에선 무턱대고 노사정위원회에 나오기도 어려웠을 법하다. 그래서 명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치권을 동원하는 것은 ‘노사 자율’을 외치는 노동계의 신념과 배치되는 것 아닐까.

 지난해 12월에도 한국노총 집행부는 상급단체에 파견되는 노조간부의 임금을 기업이 대도록 하는 내용의 법개정을 부탁했다. 김성태 의원이 이를 발의했다. 다행히 환노위원들이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이런 전력 때문에 정부와 경영계에선 “국회 환노위가 한국노총 민원해결 기구냐”는 불만이 나온다.

 노사정 대화까지 정치권이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면 합의가 나온다고 해도 정치색이 덧씌워진 기형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 합의가 이행될 리 만무하다. 대화가 노·사·정 어느 한쪽의 민원성 요청에 따른 것이라면 더 그렇다. 노사정위원회를 설거지하는 기구로 전락시키는 건 그 기구를 이끌어가는 당사자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글=김기찬 경제부문 선임기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