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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한·미 관계|천8백82년 수교 후 1세기|노·일의 세력틈새에서 청의 조정으로 수호조약|대표집필 이보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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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882년 한미 양국사이에 국교가 이루어진 뒤 어언 1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 동안 일본의 강점으로 양국의 국교관계가 불행히도 약40년 동안 중단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8·15광복이후로는 특히6·25사변을 계기로 하여 양국의 우호가 해를 거듭할수록 깊어져 오늘에 이르러 양국의 관계는 거의 순치의 관계에 이르렀다하여도 무방할 정도로 되어있다.
오늘날의 한미양국의 관계는 이와 같으나 양국의 국교가 이루어진 연유를 생각해 보면 그 국교는 결코 양국의 직접적 접촉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국교, 즉 당시의 용어로는 개국에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한 나라는 은둔국인 우리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40년대에 중국과 조약을 맺고 50년대에 일본을 개국시켜 태평양과「아시아」로의 진출을 하나의 국가적 사명으로 삼고있던 당시의 미국으로서는 우리의 개국은 조만간 해결해야 할 하나의 과제로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이 과제를 성급히 해결하려던 나머지 71년 양국간의 군사적 충돌을 초래한 신미양요라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후 10년이 지나 1880년 미국은 다시 일본의 알선을 얻어 우리의 굳게 닫혀진 문을 두드렸으나 그 문은 좀체로 열려지지 않았다.
이러는 동안 우리 나라를 둘러싼 동북아세아의 국제정세는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서서히 우리 나라로의 진출의 태세를 가다듬고 있었고, 이 무렵 제정「러시아」의 남진책도 차차 우리 나라를 엿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에 당황한 나라는 당시 우리의 종주국으로 자처하고 있었던 청국이었다. 그리하여 청은 남으로는 일본에, 북으로는 노에 대처하기 위하여 우리의 개국에 대하여 종전에 가졌던 미온적 정책을 버리고 이른바「이독공독, 이적제적」의 정책 밑에서 우리에게 개국을 권고하고 그 상대국으로서 미국을 천거하기에 이르렀다.

<청·미주도하에 수교>
당시 청은 우리에게 미국을 천거하는데 있어 황준헌의「조선책략」을 일례로 든다면 미국을『민주공화국으로서 항상 약소국을 도와 공의를 유지하고 남의 나라의 땅과 백성을 탐낸 일이 없는』나라로 소개하였다. 한편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미국에 유리한 소개와, 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에서도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개국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결국 청의 개국 권도책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서도 우리는 직접 미국을 상대로 국교를 교섭하지는 않았다. 교섭자체는 남의 나라인 청의 천진에서 청의 이홍장과 미국의「슈펠트」사이에 진행이 되었고 우리측의 의사는 당시 천진에 주재하고 있던 영선사 김윤식을 통하여 교섭의 최종단계에서 간접적으로 타진된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미측은 청한의 종속관계를 명문화하려던 청측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청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미양국 중 일국이 제삼국으로부터 부당한 처우를 당할 때에는 서로「거중알선」한다는 것을 약속하기도 하고 치외법조의 잠정적 성격이나 관세자주권의 원칙을 인정하여 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청미 주도하에 작성된 한·미 수호통상 조약안은 당시 국제적 관례에 따른 불평등조약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그러면서도 일보 탈피한「선약」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제물포에서 한미양측의 대표사이에 거의 수정 없이 조인되어 정식 조약으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우리를 개국시킨다는 연래의 숙원을 풀었고 우리는 미국으로 하여 세계에 눈을 뜨게되었다.
양국의 수교이후 대체로 19세기말까지 미국은 대한정책으로서 불간섭·불개입주의를 견지하였다.
이 바람에 한미의 수교를 알선 주재한 청이나 수교의 당사국인 우리나 미국의 대한정책은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못되었다. 청의 경우에는 노일의 견제세력으로서 이용하려던 미국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는데 대하여 불만이었고 우리의 경우에는 수교를 계기고 청한의 종속관계에서 탈피하려던 기대가 어긋난 데 대하여 불만이었다.
수교초기에 초대공사「푸트」나 대리공사「펄크」에 의하여 한때 청한의 종속관계가 반발을 받은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은 미국의 정책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독자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펄크」같은 이는 청의 강력한 항의로 본국에 소환되는 일조차 있었다. 결국 이 시기의 미국은 국제정치에서나, 경제적 측면에서나 우리에 대하여 국교를 유지한다는 이상으로는 뚜렷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한·미 양국의 우호는 장래에도 크게 영향을 미칠 정도의 굳건한 토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우선 정부의 차원에서는 83년 유미 사절이 미국정부의 초청으로 미국의 문물을 시찰하였고, 87년에는 청의 완강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우리의 초대공사를 영접하였고 우리의 요청에 의하여 영어교사를 보내어 86년 육영공원이 설립되고, 또 군사교관도 오게되어 88년 연무공원이 발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국의 우호는 정치차원에서 보다는 민간차원에서 보다 강력히 보다 깊게 증진되었다. 그것은 미국이 우리의 개화를 선도하였기 때문이다. 수교이후 얼마 안 가서 우리 나라에 오게 된 미국의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포교하는 한편 교육사업에도 종사하여 이른바「신학문」을 우리에게 전하게 되어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우리도 선진된 서양무명의 일단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미국의 민간인은 선교를 통한 우리민중의 개화계몽에만 자족하지는 않았다.

<독립운동 적극적 지원>
청일전쟁·을미사변·아관파천 등의 사건으로 우리 나라가 청·일·노의 세력각축장이 되어 우리의 독립보전이 풍전의 등화와 같은 상태에 이르렀을 때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와 더불어 우리의 독립운동을 공공연히 지원하고 나섰다. 이와 같은 재한 미국인의 동태는 미국정부의 대한불간섭정책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97년 미국정부는 주한미국공사「실」에게 훈령하여 미국민간인이 한국의 정치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엄단하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의 독립지원을 정치운동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주재국의 무력한 국민을 돕는 일을 복음을 전파하는데 못지 않은 하나의 사명이며 자유를 존중하는 미국민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거의 미국의 선교단체의 전통과도 같이되어 그 뒤 3·1운동에서 다시 한번 크게 발로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무렵, 즉 19세기말 미국의 대한정책은 서서히 변질하고 있었다. 98년 미서 전쟁의 결과「필리핀」을 동양진출의 강력한 기지로 확보하게 된 미국은 동양에서 펼쳐지는 국제관계를 종래 관망해 오던 정책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정책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이 구상의 첫 표현이 99년 발표된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이며 두 번째의 표현이 1900년 의화단사건에 대한 공동출병이었으며 세 번째의 표현이 1905년「계-태프트」비밀협정으로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사전에 승인한 일이었다.

<미서 일방적 조약 폐기>
이 보다 앞서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일로의 대립이 전쟁으로 발전하자 당시의 미국 대통령「디어도·루스벨트」는 미국의 이 지역에서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는 친일이 바람직하다는 정책을 세웠고 이에 대하여 선교사출신의 주한미국공사「알렌」은 친노정책을 표방하여 대통령에게 맞서기도 하였다.
결국 일본의 승리가 굳어지자 미국은 일본의 대단치도 않은「필리핀」에 대한 진출을 배제한다는 명분 하에 우리의 국가적 운명이 결정되는 일노의 강화가 성립하기도 전에 전기의 협정을 서둘러 맺었다. 그리하여 20여년 지속되어온 양국의 국교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의 없이 우리가 전혀 모르는 동안에 미국만의 독립적 의사에 따라 불행한 종말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단이전의 한미 관계는 시와 종에 있어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고있으나 바로 이 차이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도 어느덧 두 개의 상반되는 미국관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하나는 이상주의적 미국관으로서 미국은 우리를 개국시킨 나라요, 개화로 이끌어준 나라요, 한말의 복잡한 국제관계에서 우리의 처지를 동정하고 우리의 힘이 되고자 애쓴 국민이 있었다는 데에서 나온 미국관이다.
다른 하나는 냉혹한 현실주의적 미국관으로서 미국은 자국의 국가적 이익을 추구하는데 있어서는「거중알선」이니 국가간의 신의를 잊어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와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우리의 운명을 제멋대로 결정해 버렸다는 데에서 나온 미국관이다.
물론 미국의 입장에서는 두 개의 미국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현실추구의 냉혹한 미국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때 그때의 국면에 따라 양국의 이해가 일치할 때 미국은 좋게 돋보여 갑자기 우호의 도가 높아지게 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미국은 나쁘게 돋보여 심지어는 크게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마저 갖게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개의 미국관은 2차 대전 말기에 다시 한번 강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우리에게 안겨졌다. 「카이로」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좋은 미국은 얼마 안 가서「얄타」와 종전의 과정에서 한국을 분단시킨 나쁜 미국으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전후 소련과의 대결에서 세력균형을 잡으려는 구상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우리 민족이나 미국에 가져다준 불행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다.
결국 양국은 6·25사변에서 인적·물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으나 한국의 분단상태는 조금도 시정되지 않았다.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그러나 6·25의 혈전을 계기로 양국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해져 나갔다. 비록 국토통일의 염원은 멀리 사라졌으나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는 미국의 지원이 필요했던 우리의 입장과 동북아에서의 현상을 유지하려면 한국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미국의 입장이 그후의 양국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사원조·민간투자 등 도합 90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돈이 뿌려져 우리의 군대는 막강하게 되고 우리의 경제는 재건·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경제면에 있어서의 한미의 유대는 강화되어 우리의 대미수출입이 미국의 총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에도 미달하는 미세한 것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 경제에서 미국의 경제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의 대일 의존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커서 우리경제의 사활의 열쇠를 갖고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6·25맞아 혈맹의 관계>
뿐만 아니라 65년부터는 그때가지 거의 국제적 무관심과 독립 속에서 미국단독으로 수행해오던 월남전쟁에 미국의 요청을 받고 우리도 참전하여 한미의 관계가 혈맹의 관계라는 것을 입증하기도 하였다. 이 동안 문화·기술면에 있어서의 한미의 교류도 활발해져서 오늘날 우리 나라의 각방면에서 일하고 있는 지도층에서 상당수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거나 단기간이라도 미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이와 같은 원조와 교류를 통하여 우리는 미국의 외형적 교화를 때로는 충분한 소화 없이 받아들이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한편 미국의 내형적 문화라고도 할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사상과 그 행태는 어느덧 이 땅에 깊은 뿌리를 박게되었다. 예하면 4·19혁명은 바로 이러한 면에 있어서의 미국의 영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69년「닉슨·독트린」에 이어 미국의 대외정책이 긴장완화의 정책으로 굳혀가면서 한미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하자 미국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의 안전보장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언명했다.
그러나 한국의 부재 속에 한국의 운명이 결정된 역사적 경험을 몇 번이고 겪은 우리에게 그러한 미국의 다짐은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한편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우리의 남북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기도 하였으나 북괴의 일방적 거부로 남북간의 대화가 정돈상태에 빠지게 되자 국민총화로써 대결해야 한다는 견지에서 오히려 국내적으로는 긴장강화의 체제가 이루어져 나갔다.
그러나 바로 이 체제가 국내외에서 크게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물의가 비등하는 가운데「포드」미국대통령의 방한은 드디어 실현케 되었다.

<「포드」맞는 우리 자세>
그러나 그를 떠나게 한 미국국민의 심정이나 그를 맞이하는 우리의 심정은 60년의「아이젠하워」대통령이나 66년의「존슨」대통령의 방한의 경우와는 달리 참으로 착잡하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의 그의 방한은 양국에 무슨 이익을 가져다주느냐에 대하여, 특히 미국 내에서는 우리의 국내문제에 무슨 보탬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한미양국의 정부와 국민은 그의 방한이 주는 상미적 의의에 대하여는 무언중에 동일한 이해에 도달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방한은 한미간의 유대를 다시 한번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며, 그럼으로써 북괴의 도발로 항상 위협을 받고 있는 한반도의 현상유지와 미국이 의도하고 잇는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미·일·소·중공 4개국의 세력균형의 유지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포드」대통령의 방한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고, 또 그러한 문제점은 이 뒤에도 당분간 논의될 것이나 그것이 어떠한 내용의 것이든 간에 우리로서는 2차대전후 지속되어온 양국의 우호관계가 단순히 우리의 대외문제에 있어서 뿐 아니라 대외문제에 있어서도 지속되기를 바라고 있다는데 대하여는 아무런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는「포드」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우리로서는 한미간의 바람직한 관계가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방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이 현실 속에서 다시 한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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