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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포럼] '이미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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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좌파의 선전선동술은 독특하다. 반미정서를 파급시키는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다. 그것을 차단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로선 불행한 전통이다."

워싱턴의 조지타운대에서 만난 미국 행정부 관리의 얘기다. 불행한 전통은 한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흔들리는 한.미동맹의 사례로 그는 언론 보도를 들었다.

"지금처럼 미국 언론에 북한(핵).남한(반미) 뉴스가 수개월간 집중적으로 나온 적이 없다. 1950년 한국전쟁 후 처음일 것이다. 70년대 박동선 사건 때도, 94년 첫 북핵 위기 때도 그렇지 않았다."

그 불행한 전통은 해방 직후 시작했다. 워싱턴 국립문서보관소의 자료는 실감난다. 45년 8월 일본 패망 후 남쪽엔 미군이, 북쪽엔 소련(현 러시아)군이 들어왔다. 한국 진주 후 내놓은 양쪽의 포고문은 대조적이다.

미군 사령관 하지의 포고문(한.영문 동시 발표)이다.

"미군 상륙은 귀국을 민주주의 제도 하에 두고 국민의 질서유지를 도모함이다. 민중 각자는 생업에 전념하라. 이기주의로 날뛴다든가 일본인 및 미군에 대한 반란행위, 기관 파괴의 경거망동에 휩쓸리든가 하는 행동을 엄히 피해야 한다."

무미건조한 문구다. 일본을 축출해준 데 고마움을 표시하려던 한국인을 당황하게 할 만큼 위압적이다. 반면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포고문은 어휘 코드부터 달랐다.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동맹국 군대들이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노예적 과거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들 수중에 있다. 당신들은 자유와 독립을 찾았다.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

치스차코프의 '자유국' 메시지는 한국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줬다. 하지의 '경거망동'표현에 당황하던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감성이 넘치는 좌파적 선동술의 묘미였다.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킨 주역이고 소련은 들러리였다. 소련은 교묘한 선전술을 통해 한반도에서 영향력의 격차를 메웠다. 반면 미국은 이미지 관리를 등한히 했다. 질서유지.생업 같은 실용을 중시하는 미국인에게 해방.만세 같은 선전술은 익숙하지 않다.

그런 차이가 한국 내 좌우 이념대결의 성격과 특징이 돼버렸다. 실질보다 명분을 앞세우는 한국의 문화 풍토에 감성으로 포장한 좌파의 선전술은 잘 먹혔다. 극렬 좌파들은 동맹과 공조를 주눅들게 하는 용어가 자주와 민족임을 터득했다.

하지 사령관은 워싱턴에 이런 전문도 보냈다. "미국이 나라를 분단했다고 한국인의 원성이 커진다. 친미주의는 나쁜 말이 되고 있다." 반세기가 지난 지난달 미국 CBS방송에 출연한 찰스 캠벨 미8군사령관의 눈물은 하지의 낙담을 연상케 한다.

한.미동맹의 틀을 활용한 한국은 수많은 신생 독립국 중 유일하게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했다. 그럼에도 건강한 우파가 중심인 우리 사회의 주류는 그들이 이룩한 극적인 성취를 매력있게 관리하지 못했다. 현대사 논쟁에서 좌파한테 주도권을 잃었다. 이미지, 역사의 상상력, 시대적 감수성을 소홀히 한 탓이다.

민족과 자주는 좌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승만.박정희.김영삼은 세계무대에서 민족과 자주를 힘있게 내세우려고 경제와 민주화에 진력했다. 그것을 위해 한.미 공조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수백만 주민이 굶주려도 핵무기에 돈을 쓰는 북한 정권의 위선적 자주.민족과는 다르다.

건강한 주류 세력은 한국의 성취와 장래를 세련된 이미지로 내놓아야 한다. 이미지 전쟁에 나서야 한다.

박보균 논설위원 [워싱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