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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피아니스트 정명훈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등 소인과 말 안 통해 미소만>
7월 4일 새벽 갑자기 「호텔」 내방의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깜짝 놀라 누굴까 하고 수화기를 들었더니 반갑게도 「시애틀」에 사는 명근 형의 목소리가 아닌가. 「모스크바」에 온지 한달만에 처음 들어보는 한국말이었다.
형은 내가 2등 했다는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스케줄」이 끝나는 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이르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그 동안 있었던 얘기들을 주고받느라고 전화통을 붙잡은 채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형과 통화를 해서 그래도 마음은 풀렸지만 나는 고국에 계신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경화 누나에게 직접 알릴 길 없어 안타까왔다. 다만 많은 기자들이 사진도 찍고 취재도 해 갔으니 지금쯤은 형처럼 신문을 보고 알고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형과 통화를 끝내고 나니 벌써 창 밖은 훤해 오고 있었다. 이곳은 북반구의 여름이라 그런지 낮이 길고 새벽 서너시만 되면 벌써 동이 트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객지 생활을 많이 해 온 나였지만 「모스크바」에 경연하러 왔다는 긴장에다 밤까지 짧으니 도무지 하루도 깊이 잠들 수가 없었다.
이날은 「피아노」부 입상자들이 처음으로 경연 아닌 시범 연주를 하는 날이었다. 오전부터 시작한 이 기념 연주회는 역시 「모스크바」 국립 음악원 안의 「차이코프스키·콘서트·홀」에서 열렸고 「모스크바·필하모니·오키스트러」와의 협연이었다. 나는 「셍상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쳤는데 전에 없이 모든 청중들로부터 우레 같은 박수를 받았다.
이날 저녁에는 시상식이 있었고 다음날 5일에도 또 연주회가 있었다. 나는 전날과 같은 곡을 연주했다. 5일 저녁에는 각 부문 수장자들이 모두 참석하는 축하 「리셉션」이 「크렘린」궁의 「메인·홀」에서 열렸다.
이 「홀」은 한꺼번에 5천명이 들어 올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큰 「홀」이었다. 「샹들리에」가 수도 없이 휘황찬란하고 장식들이 모두 화려했다. 나는 1등을 한 소련인 「가브릴로프」와 무슨 얘기나 좀 나눠 볼까 하고 옆으로 가서 말을 걸었는데 그는 영어를 통 못하는지 얘기가 되질 않아 그냥 서로 웃고 말아 버렸다.

<취입한 반 보내 주겠다 약속>
7일, 8일 이틀 동안은 소련의 국영 「레코드」 사라는 「멜로디아」의 「스튜디오」에 가서 취입을 했다. 나는 「하이든」과 「쇼펭」의 「소나타」를 독주했는데 주최측 얘기로는 이 판이 나오는 대로 곧 나에게도 보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9일은 입상자들의 고별 연주회 날이었다. 「피아노」 부문만이 아니라 「바이얼린」·「첼로」·성악 등 각분야의 1·2·3등 입상자들 모두가 나오는 날이었다. 또 지난 4, 5일은 「오키스트러」와의 협연이었지만 이날은 각자 독주를 하는 것이었다.
「차이코프스키·콘서트·홀」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특히 이날은 많은 청중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주자에게 꽃다발을 계속 주는 것이 특이한 풍경이었다.
나는 이 고별 연주회에서 「하이든」의 「피아노·소나타」를 한20분간 독주했다. 청중들의 반응은 전에 없이 열광적인 것이었다. 꽃다발 세례를 받으면서 이례적으로 세 번씩이나 「앙코르」를 받은 것이었다. 청중들이 특히 나에게 열광적이었던 것은 이날 1등한 소련인 「가브릴로프」의 연주가 엉망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달간 북한 사람 구경 못해>
10일은 내가 「모스크바」를 떠나는 날이었다. 이제 집으로 가게 됐다고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부터 짐을 챙기고 있는데 AP통신사와 소련 신문사의 기자 2명이 찾아와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대로 다 얘기해 버렸다.
이번 「모스크바」의 연주 여행은 모두 한달 하루였다. 연주 연습하고 경연하느라고 언제 지났는지 모르게 지나가 버린 한달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모두가 추억에 남을 나날이었고 또 나에게는 유익한 나날이었다고 하겠다.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소련 사람들은 내가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한국인이라고 해서 별다른 대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두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친절한 편이었다. 통역 겸 안내원 「세게이」도 끝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호텔」의 「서비스」도 미국보다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처음 집을 떠날 때 「모스크바」에 가면 북한 사람을 만나게 될 테니 조심하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실상 「모스크바」에서 머무른 한달 동안 나는 그런 사람은 만나 보지도 못했다.

<기운 차리면 다시 소련에>
이번 음악제의 상위 입상자는 「차이코프스키·콩쿠르」 위원회의 초청으로 1년내 아무 때든지 소련 연주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 지역도 「모스크바」뿐이 아니고 「레닌그라드」와 다른 도시들도 순회하는 모양이었다. 나도 물론 기운을 차리는 대로 다시 갈 것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이번 음악제에서 2등을 했다고 섭섭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의 음악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고 앞으로 얼마나 열심히 해서 큰 음악가가 되는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스크바」의 무더운 여름날 오후, 한달간의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는 나의 머릿속에는 지나간 일들과 여러 가지 생각들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다음 「모스크바」에 올 때는 소련 청중들을 더욱 열광케 해야지 하는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것이 한동안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는 것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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