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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국제부문 차장
지난해 12월 17일 민주당은 “박근혜 대통령은 대처의 길이 아니라 메르켈의 길을 가야 한다”는 논평을 냈다. “제1야당을 제압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상생의 정치를 선택했다”고 독일 메르켈 총리를 평가했다. 뒤늦게 이 논평을 꺼내 드는 이유는 ‘포용’은 여권만 아니라 야권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지금까지도 야권을 지배하는 프레임은 ‘민주 대 반민주’다. 그런데 민주 대 반민주의 논리가 과거 민주화의 동력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 바탕에 정체성으로 세상만사를 판단하려는 태도가 숨어 있다면 과하다. 민주주의가 발전할수록 사회는 다원화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갈등을 ‘민주 대 반민주’로 덮을 경우 이해의 충돌이 자칫 선악의 충돌로 포장이 된다. 민주 대 반민주는 이면에선 ‘비(非)민주’를 양산할 수도 있다.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엔 대화와 타협을 통한 갈등의 조정도 포함된다. 그런데 상대를 ‘반민주’로 규정하는 순간 대화의 여지는 줄어든다. 지난해 민주당은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여권과 맞붙었는데 이 과정에서 101일간 장외투쟁을 했다. 국정원 댓글 사건은 반복돼선 안 되는 게 분명했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여의도 국회보다 서울시청 앞 천막당사가 중심이었던 것은 의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민주 대 반민주의 또 다른 그늘은 정치적 양극화다. 반민주와 종북은 항상 쌍둥이로 등장한다. 지난해 9월 정기국회가 파행되는 와중에 “새누리당의 뿌리는 독재 정권”이라는 민주당과 “종북 세력의 숙주 노릇을 하지 않았나”라는 새누리당이 충돌한 게 그렇다. 이런 식의 공방은 각자의 지지층 결집에는 도움이 되나 상대를 향한 분노를 축적시키며 통합이라는 사회적 자본을 갉아먹는다. 연평도에 포를 쏘고 천안함을 폭침시킨 북한과도 대화하라는 게 야권의 일관된 논리라면 같은 체제에서 살아가는 여권과는 필요하면 타협할 수 있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결과적으론 민주 대 반민주에 자리한 정체성이 유일 잣대가 될 경우 야권에서 한국판 메르켈의 등장은 쉽지 않다. 메르켈 총리가 친(親)원전 정책이라는 기민당의 정체성을 고수했다면 원전 폐기를 수용할 수 있었겠는가. 민주당은 과거 집권 시절인 2004년 정체성을 따르지 않은 적이 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 내부에서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반발하고 지지 세력이 이반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미국·영국에 뒤이은 세계 세 번째 규모로 이라크에 파병했다. 그해 12월 노 전 대통령이 자이툰 부대를 찾았을 때 한 해병대원이 그를 껴안아 번쩍 들어 올렸고 이 사진은 잔잔한 감동을 줬다.
민주당이 여당과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지지층이 다르니 그렇다. 그렇다고 민주 대 반민주의 정체성을 모든 현안에 적용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메르켈 리더십이 우리 정치에 필요하다면 여야 할 것 없이 “우리는 왜 안 되는가”라고 고민하는 게 솔직한 태도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