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9》「공비」로 불린 항일 연군|이명영 집필(성대 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제자=김홍일>항일연군의 보급이 어떻게 이루어졌던가를 살펴보면 그 부대의 본질과 그 사람들의 본색을 알 수 있다.
일·만 군경의 거듭된 공격 때문에 평지에는 밭을 붙이지 못하고 험준한 산 속만을 골라 다녀야하는 처지에 있어서 보급은 생사의 가름길이었을 것이다.
항일연군이 일정한 근거지를 갖고 있었을 때(1933, 4년께)엔 그 근거지 구역 안의 당 조직을 통해 민중들로부터 식량과 의복의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일군에 밀려 근거지 잃어>
그러나 일만측의 공격 때문에 근거지를 포기하고 산 속으로만 유동하게 되면서부터 보급 받을 데가 없어졌다. 그러니 자연히 강압적 수단에 의해 물자를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제2군 제1사(노군 편성 이전)의 제1단 군수처장으로 있을 때의 최현(북한의 최현이 아님) 의 협박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소황구(자강연지최십가장가) 각 가장 앞
너의 가장들은 내일 모래 이틀간에 옥수수·콩·팥 등 계 3석 5두와 소금 10근을 한 알도 덜하지 말고 완전 징수하여 산유천으로 송부하라. 이틀간에 도착하지 않으면 가차없이 징벌 당할 것이다.
제2군 제1사 제1단 군수처장 최현 인 액목현하에서 있었던 또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니추구관계갑장 각패장급각호장 앞
본 군은 우리와 동포가 연합하여 일본 귀자를 치고자 한다. 따라서 동포는 모두 항일구국을 원조하여 총 있으면 총을, 사람 있으면. 사람을, 금전이 있으면 금전을, 물품이 있으면 물품을 내놓아야 한다. 이제 특히 귀갑관계에 바라노니 대단자 50척·황견 10척·금포 50척·백봉사 10권·문하지도 1장·복사지 2장을 기부, 5일 이내에 실행함으로써 동포로서의 항일 우국의 의심을 표시하라. 만약에 이를 듣지 않을진대 귀갑 동포는 친일 하여 일본에 납세하고 도우며 중국인을 죽여 도울 줄 모르는 것으로 보고 일본 귀자 타도차 본 군이 귀소에 갈 때엔 여러 가지 처리법이 있을 것이다. 특히 통지하노니 변명을 원치 않는다.
동북 항일연군 제1군 제2사 사령부 인
이상과 같은 협박으로 물자를 징수할 때는 항일연군의 위력이 그나마 어느 정도 남아있어 민중들이 보복을 두려워서라도 협박에 응하지 않을 수밖에 없던 지역에서는 통했으나 일·만 측에 의한 치안력이 차차 강화되고 항일연군 측의 위력이 위축되어감에 따라서는 협박으로도 민중이 응하지 않게 된다. 그때 항일연군의 물자조달방법은 약탈·납치밖에 더 있을 수 없었다.

<"우선 귀를 잘라 보낸다">
항일연군은 처음부터 부자나 친일분자에 대해서는 약탈과 납치를 당연한 것으로 일삼았으나 보급이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서는 빈부·친 반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납치하는 것은 석방조건으로 상당한 금품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빈자를 납치해서는 소용이 없었다. 돈화현하에서 있었던 그 한 예를 써보자.
『훈복기 가정 노유, 온검급 전 가정 모두 같이 보아라.
본 군은 5일전에 너희들 가족을 납치했는데 이는 너희들 가족을 살해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너희들 재산의 일부를 얻어 아군의 반일 전비에 보충코자 함이었다. 우리는 살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너희들이 금품의 준비를 아니하면 절대로 용서치 않는다. 너희들이 일제를 돕고 애국을 모르는 지주가 아니거든 조속 당지에 와서 처리하라. 훈폭기가에 대해서는 5일 안으로 내의 1백 50벌 제공을 명하였거니와 아직 실행치 않음은 괴이하도다. 만약 내일 오전 중으로 제공치 않으면 우선 인질한 사람의 귀를 잘라 너희들 집으로 보낼 것이며 그런데도 3일 안으로 제공치 않으면 인질전부의 머리를 베어 보내줄 뿐이다.
온의 집에도 속히 알리라. 동시에 수계 삼가에서도 내일 중 금품을 제공치 않으면 일단 인질의 귀를 잘라 보낼 것이라고 전하라. 제2군 제1사 제1단 정치위원.』
동북항일연군에서는 납치한 인질에 대해 석방조건으로 금품을 매기거나 그 교환업무를 관장하는 책임은 사단의 정치위원에게 맡겨져 있었다. 따라서 정치위원은 부대의 정치적 지도라든가 인근주민에 대한 정치공작만 맡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능적이며 악랄한 납치, 재물 교환 등 업무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납치작전, 빈부를 가리지 않는 약탈, 순종치 않을 때의 무자비한 보복 등 악랄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항일연군은 공비(동북인민혁명군 때도 같았다)로 전락하고 말았다.

<끝내는 연명에만 급급>
이 공비란 말은 1925, 6년께 중국남부지방에서 공산혁명을 부르짖으면서 약탈질을 일삼던 농민유격대들의 만행을 지칭하여 그 지방일대의 토비와 구별하기 위해 농민들이 공비라 부른데서 비롯된 용어다.
이 용어는 이내 만주지방에서도 통용되었는데 구 동북정권(장작림·장학량)시대부터 만주에는 토비, 병비, 공비의 세 가지 비적 떼가 있었다. 모두 지방주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토비는 마적과 같은 무리들에 대한 호칭이며 병비란 이름은 동북정권의 지방주둔부대가 양민들에 대한 토색질이 심했기 때문에 붙어진 것이었다.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 시켜주지를 않는 법이다. 항일연군이 아무리 반만 항일을 내걸고 계급타파의 미명을 신조로 했다손 치더라도 그들이 한 짓이란 공비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다.
만주의 중·한인이나 일만 측이 다같이 항일연군을 공비라 부른것은 당연하다. 무차별 약탈·살인·납치·방화로 겨우 연명하는 처지에서 항일투쟁의 실적도 대단할 수는 없었다. 항일연군은 강제 징발한 천으로 만군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부대 안에 재봉대라는 것이 있어서 여자대원들이 주로 이에 종사했다. 목피로 옷을 물들여 입었다. 금장도 빨간 천으로 만군과 비슷하게 해 달고 있었다.
무기는 장비·병력이 약한 일만 군경 측을 습격한다든지, 항일연군으로 합류하지 않는 마적부대를 습격해 입수했다. 또 일만 군경 측으로 교묘히 침투하여 총탄을 구입하는 방법도 썼다. 또 간단한 탄약은 자체의 비밀산채에서 제조하기도 했다.

<항일전 실적 보잘것없어>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으로 입수하는 무기란 극히 제한된 것이어서 만주성위는 예하 부대들에 쓸데없는 전투는 벌이지 않도록 지시까지 했었다. 그것은 인명과 무기의 손실만 가져온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결정적으로 약할 때만 전투를 벌이도록 했다. 일만 측의 단단한 부대와의 교전은 언제나 피했다. 항일연군의 전투실적을 더듬어보면 우리 독립군의 청산리 싸움 만한 규모의 전투와 승리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항일연군의 생활양식과 작전방식도 그 원형은 모두 마적들의 그것으로부터 나왔다. 위계질서와 근거지 선정방법, 보초서는 방법, 소년소녀를 납치해 기르는 방법에 이르는 것까지 모두 같았다. 작전에서도 「성동격서」「화정위령」「이령화정」의 마적전술을 그대로 썼다.
이와 같이 마적가와 항일연군과의 가지가지의 공통점은 마적들에게서 배울 점이 많았던데도 기인하고 또는 많은 마적들이 항일연군으로 합류·포섭되었기 때문이다.
동북인민혁명군이든 동북항일연군이든 또 그 속의 제6사장 김일성이든 제4사 제1단장 최현이든 또 기타의 한인이든 다같이 공비였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의 김성주도 최용건도 최현도(그리고 김영주도 한때)다 항일연군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므로 그들은 다 직업적 비적으로 화했던 공비출신들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