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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방문기|서대숙<하와이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나는 1946년 북한을 떠난 뒤 28년만에 평양을 방문했다. 4월 30일부터 5월 14일까지 2주일간의 북한체재로 뭔가 적절한 주제를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 짧았다.
나는 「모스크바」 경유로 북한에 갔다가 북경과 「홍콩」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왔다. 내가 평양을 방문한 목적은 북한·미국간의 학술교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북한에 관한 이 학술회의에 참가하도록 북한 과학원 학자 5명의 초청을 주선하려는데 있었다.
북한 학자들이 현재의 미·북한간의 정치적 난관을 이유로 우리의 초청을 거절한 것은 유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인 분위기가 좀더 호전될 경우의 이러한 학술교류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다.
나는 북한 과학원학자들과 김일성 대학 교수들과 만날 기회를 갖고 그들과 함께 한국통일에 관련된 광범하고도 복잡한 문제에 관한 기본적 연구방법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는 연구방법과 그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다는 점을 숨길 수 없었으나 이 토의는 서로가 유익한 것이었다.
아울러 나는 노동당 지도자들과 일련의 토론을 갖고 『김일성 사상으로 전 인민을 무장 화』하기 위한 그들의 훈련 및 여러가지 계획을 들었다. 그들의 반미감정은 극도로 고조되어 있었으나 미국에 대한 트집 투성이의 비난내용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에 대해 거의 무지하며,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김일성과 그 일가의 출생지(만경대 봉학리 칠골) 청산리의 모범협동농장·신천 박물관·탁아소 및 백화점 등 여러 흥미 있는 곳을 구경할 기회를 가졌다.
가장 흥미로 왔던 곳은 김일성의 환갑기념으로 새로 세워진 거대한 혁명박물관이었다. 나는 이 박물관에서 이곳의 소장자료를 연구하면서 수일을 보냈다. 국민들이 그들의 지도자에 대해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알 수 있었는데 김일성의 찬양은 이성의 한계를 넘은 것처럼 보였다.
평양거리는 청결했으며 여자들은 치마·저고리, 남자들은 인민복을 입고 있었다. 사회는 제복의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조직돼 있는 것 같았다.
비록 혼자 행동할 만큼 자유스럽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내게 친절하고 정중했다. 실상 내 여행 중 가장 괴로웠던 것은 평양에서 있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무책임한 H일보의 내 방문에 관한 왜곡된 기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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