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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경민 칼럼

신흥국 위기, 강 건너 불일까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09년 9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속이 탔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월가는 물론 미국 ‘빅3’ 자동차회사마저 벼랑 끝에 몰렸다. 안방에 불이 났는데 설상가상 이웃 유로존마저 재정위기가 들불처럼 번졌다. 미국·유럽이 주축이 된 주요 7개국(G7)만으론 감당이 어려웠다.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을 이끌어 낸 1985년 플라자합의 때까지만 해도 G7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와 한국 등 신흥국의 성장으로 G7 비중은 50% 아래로 떨어졌다. 고심 끝에 오바마가 짜낸 묘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였다.

그전까지 사교모임에 가까웠던 G20 정상회의가 정례화됐다. 2010년 11월 첫 정례회의의 스타는 주최국 한국이었다. 만년 무역수지 흑자국인 중국·독일·일본은 내수를 자극해 수입을 늘리고 적자국인 미국은 달러 약세 기조 속에 수출을 늘려 국제적인 불균형을 바로잡자는 ‘서울 합의’가 나왔다. 30년대 세계적 불황에 맞서 세계 각국이 보호무역주의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대공황이란 아픔을 겪었던 전철을 밟지 말자는 공감대도 이뤘다. G20 공조 덕에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초저금리 정책에 이어 사상 유례가 없는 세 차례 양적완화(QE)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한데 미국·유럽이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나자 태도가 싹 달라졌다. Fed의 양적완화 정책은 비정상적 극약처방이다. 그렇다면 이를 거둬들이는 과정 역시 ‘정상적’이기 어렵다. Fed의 ‘테이퍼링(tapering)’ 개시 후 신흥국이 요동치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5년 전 미국 힘만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감당할 수 없었듯 지금 신흥국 위기 역시 신흥국 금리 인상만으로 수습하긴 역부족이다. 그러나 어느새 오바마의 입에선 ‘G20’ ‘국제 공조’란 단어가 사라졌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간) Fed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조차 신흥국의 기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적완화 규모를 100억 달러 더 깎아 버렸다.

FOMC 성명 어디에도 신흥국 위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Fed는 항변할지 모른다. “Fed는 미국 법에 따라 세워진 기관이다. 그 법에 미국의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이 Fed의 임무라고 못 박혀 있다”고. 그러나 5년 전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에 맞서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이 자국 통화 평가절하로 ‘환율전쟁’을 벌였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Fed가 세 차례나 양적완화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었을까? 후안무치(厚顔無恥)하기론 월가를 따를 수 없다. 골드먼삭스 로이드 블랭크페인 최고경영자(CEO)의 말은 걸작이다. “평화 시엔 신흥국 국가명을 보고 투자한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국가명 따윈 필요 없다. 신흥국은 다 똑같다. 무조건 파는 게 상책이다.”

신흥국 위기에 ‘모니터링’이나 강화하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팔짱 끼고 있는 한국 정부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외환보유액이 아무리 많고 사상 최대 경상수지 흑자를 냈다 한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여전히 신흥국이다. 그러면서 4년 전 G20 정상회의를 주최한 국가이기도 하다. 미국·유럽에 불이 났을 때 소방수 노릇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이번 신흥국 위기 수습을 위한 국제 공조를 주도할 적임자가 아닐까. 더욱이 지난달 다보스포럼의 주제는 ‘세계의 재편(The Reshaping of the World)’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신흥국 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다시 한번 5년 전처럼 G20 차원의 국제 공조를 주창했더라면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박 대통령은 세일즈 외교만 하고 왔다. “국가명 따윈 볼 필요도 없이 신흥국이라면 무조건 팔라”는 월가 거물들 앞에서 말이다. 지금이라도 늦진 않았다. 신흥국 위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5년 전에 이어 이번엔 신흥국 구원투수로 나선다면 위기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경제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정경민 경제 에디터 jkm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