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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동북지방의 한적문화 탐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신석에 상륙한 도래인 집단 가운데서 끝내 학내진출을 마음먹은 사랍들이 택할 수 있던 통로는 두 갈래 뿐이었다.
하나는 앞서도 말한 바와같이 중부내륙의 산악지대 장야·기부현의 첩첩산중과 계곡을 헤치면서 비파호가 있는 자하현의 여오에 이르는 통로.
또 다른하나는 일본의 해안선을 따라 학내와 가장 가까운 거리인 복정현 서남부에 도달, 여기서 부터 다시 표고 2천m의 준령으로 이어진 양백산맥의 서쪽 능선을 넘어 곧바로 비파호에 이르는 통로이다.
그래서 이 두 통로의 주변과 길목 도처에는「백」자를 붙인 지명과 산명, 또는 신사 등이수없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 둘째번 통로 중에서 마지막 거쳐야 할 난관은 지금의 북육본당「이마죠」(금장)마을 앞에 가로 놓인 표고 8백m의 백산이다.
지금이야 이 험로를 뚫기위해 굴착된 북육「터널」(길이 약 8km)을 쾌속전차가 순식간에 통과 해버리지만, 아득한 옛날 친신만고 끝에 이곳에 도착한 도래인 집단들이 그들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 또하나의, 그러나 마지막 강벽을 보고서 느꼈을 회포가 어떠했으랴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인구 약 7천의 이 금장을 사람들은 지금도 자기들의 조상이 한국계라는 것을 자랑이나 하듯, 이 조그마한 마을에 두 개의 씨족신사당, 즉 백수신사와 신현신사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

<백수신사 2천여 곳에>
백수신사의「시라히게」(백수) 는 문자 그대로,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려 위풍당당했던 당시의 도래인 집단의 수장을 제신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 백수신사는 일본 전국에 걸쳐 모두 2천여 군데나 된다는 것이지만, 그 본사는 바로 이곳 금장정에서 과히 멀지 않은 자하현 자하군 타하정 이라는데 있고, 그 제신은 본연재 제3화 (『고려신사 59대궁사 고려등웅씨』)에서 언급한 고려왕 야광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김장수 저『일본속의 조선문화 1』강담시 간·P 35 및 P l22 참조)
그리고 신라신사의 제신 역시 음삼현 팔호시의 신라신사 (본연재 제10화『고구려의 유풍남긴 ,팔호타구』) 에서 본 바와같이, 우두머리(牛頭大王)의 별명을 가진 소전구존, 또는 신라삼랑회광이라 하여 모두가 한국계 도래인 집단의 수장을 가리키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 ×
그러고보면「북송선」이 떠나는 신석항은 이렇듯 우리하고는 은회간년의 끊지 못할 인연을 가진 항구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오늘 날 이 신석시내에 사는 교포들은 앞서도 잠깐 언급했 둣이 총수 약 6백호 3천여명을 헤아린다.
교포 중에는 토건업·유희강업 등으로 크게 성공한 박만규씨, 이범이씨, 권동명씨 형제 같은 분이있고, 이들 상공인들의 자체 금융기관인 신석상은신용조합 (이사장 윤철) 같은 단체는 예금고 만도 12억7천만「엥」에 달하여 교포들의 생활상태는 조련계 보다도 일반적으로 안정돼 있다는 소식이다.

<대단한 한국어 교육열>
때마침 제6회 통상총회가 열리고 있던 신석「사보이·호텔」에서 만난 민단 신석현 지방본부단장 이영종 (53) 에 의하면, 교포둥 일본정부의 생활보호자금을 지급받고 있는 영세민도 민단계·조총련계 할 것 없이 각각 약 간명씩은 있으나, 민단계는 이를 창피스럽다 하여 되도록 감추려하고,조총련계는 오히려 당연한 권리라하여 좀더 많은 생보대금 획득을 위해투쟁하고 있다한다.
일본안에 살면서도 이처럼 이질적인 적응방식을 취하고 있는 교포사회를 보면서 기자는 여기서도 국토분단의 쓰라린 상처를 건드린 것 같은 아픔을 금치 못했다.
더군다나 이곳 교포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고, 발전하는 조국의 최근 동향을 소개하기 위해 세웠다는 한국교육문화「센터」의 현황을 보고서는 그저 한심스럽다는 느낌을 털어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교포 청소년들에 섞여,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일본인들이 제법 수강을 신청해오고 있으나 그들에게 배부된 교과서란 본국의 국민학교 국어책 몇권이 있었을 뿐이다.
이「센터」에 정기적으로 배부되고 있다는 서적·잡지들도 거의 모두가 판에 박은듯한 선전 책자가 아니면 때를 넘긴 정기간행물들…

<선전용 책자는 무용>
북송선이 떠날 때마다 민단계와 조총련계 사이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지는 이 고장 대한민국 교육문화「센터」의 이같은 몰골들이란 참으로 창피스런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본국에 업무 출장중인「센터」소장 김정협씨에 대신하여 쓸쓸히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소장부인의 말을 여기 옮김으로써 신석항에 서린 은수천년의 오늘을 끝맺는 심사는 야릇하다.
『제발, 선전용「팸플리트」등 판에 박은 듯한 자료들을 무더기로 보내려 하지말고, 한편이라도 좋으니 최신의 우수 국산영화「필름」을 보내주시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한국말 교육을 위해서는 다른 것은 고사하고라도 그것이 재일교포 교육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따로 편찬한 교과서 한두권쯤은 있어야 하겠더군요…』

<차항 끝>
그 마지막 장벽이 이 마을앞에 우뚝 솟은 양백산맥의 산줄기이다.
지금은 쾌속 전차로 약 10분이 걸리는 북육「터널」(전장 8km) 이 뚫려있고 이 마을엔 백수신사·신라신사 (사진) 등 한국계 조신을 모신 신사가 둘이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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