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문화는 존재하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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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청년문화에 관한 논의가 요즈음 대학캠퍼스 안과 일반사회에서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아카데미와 저널리즘, 청년세대와 기성세대가 다같이 참여하고 있는 이 논의는 최근에 와선 청년문화의 예찬과 비판이라는 열띤 논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한가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비록 구미제국의 경우보다 한 연대의 시차는 있다손 치더라도 하나의 문화형태로서의 청년문화가 이젠 우리 나라에도 금방 누구의 눈에나 띌 만큼 독자적인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젊은이들은 과거의 젊은이들과는 달리 스스로를 『성인이 못된 미성인』 또는 『미완의 어른』으로서 보기보다도 도리어 어른을 『소모된 청춘』 『젊음의 찌꺼기』로 본다는 데에 구미제국 청년문화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청년이 과도기가 아니라 절정임을 뜻한다. 「점잖음」이 아니라 「젊음」이 곧 가치요, 덕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어른을 모범으로 하고 어른의 흉내를 내던 옛날과는 달리 오히려 어른이 젊은이들을 흉내내려는 풍조가 상업주의와 결부되어 60년대 구미의 청년문화를 만개케 했었다.
70년대에 들어와 한국의 청년문화는 문단·연예계등 각 분야에서 기성을 압도하는 고지를 이미 점령하고있다. 그들은 과거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복식, 다른 노래, 다른 언어, 다른 여가문화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국에서도 이미 이러한 청년문화는 상업주의가 편승할이만큼 광역화·일상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어른들의 상행위·여가행위의 장소였던 값비싼 도심지대가 이제는 청년들에 의해서 점거되어 가고있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물론, 이처럼 상업화한 청년문화를 경박한 모방문화라고 비난하는 일부측 주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또 거기에 일리가 없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우기 그와 같은 소리가 젊은이들 자신의 자가비판으로서 나오고 있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다.
그러나 모방문화 자체에도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할 점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의 청년문화가 나라의 분계선을 넘어 범세계적인 번짐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오늘의 청년문화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젊은이들이 주로 내셔널한 차원에서만 사물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던 데에 비해서 오늘의 젊은이들은 글로벌한 차원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그것은 오늘의 젊은이들이 과거의 젊은이들과는 달리, 전쟁을 모르고 자란 본질적으로 「평화의 세대」요, 또한 안방에서 범세계적인 동시성을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TV의 세대』라는 데서 유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통기타와 더불어 노래부르는 그들의 팝·송 가락이 설혹 국경없는 경박한 노래라 하더라도 그것이 갈수록 굴레가 무거워지는 조직사회·관리사회에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무엇보다 아쉬운 인간성·애정을 일깨워주는 것이라면 그 나름대로의 존재이유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점잖음을 커다란 사회적 덕목으로 삼고 어른들의 문화만 있었던 한국사회에서 낮선 청년문화가 등장하고 있다하는 것은 물론 기성세대의 눈에는 충격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활력을 찾게되고 젊어지기 위해서는 이처럼 어른들의 눈에 방자하게 보이는 젊은이들과 그들의 문화를 일단은 긍정하고 호의의 눈으로 보아주는 아량이 모든 청년문화 논의에 앞선 전제가 되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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