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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제자=김홍일)그 전설·실재·도명을 밝힌다-제1장 김성주의 소년 시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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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성주가 29년 봄 육문 중학생으로서 공산 서클에 참석했던 것이 발각되어 길림에서 도망쳐 이종락 부대로 갔다가 다시 남만 학원에 갔고 그곳에서 쫓겨나 또다시 이종락 부대로 되돌아갔던 시기에 해당되는 일을 북한에서는 『1929년 하반기에서 1930년 봄 사이에 길림 감옥에서 옥중 투쟁했고 식민지 민족 해방 문제·조선 혁명 노선 등을 연구했다』고 경력을 날조해 놓고 있다.
김성주가 길림 감옥에 투옥된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그의 행적으로 비추어 보더라도 자명하며 여러 사람의 증언이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 길림에 사는 한인이나 또 길림을 드나들던 독립 운동가를 비롯한 모든 한인들에게 모를 사람 없이 알려졌던 사람으로 허영백씨가 있다.

<그날로 알려진 동포 소식>
경기도에 있는 영락 교회 양로원으로 필자가 허옹을 찾아가 엎드려 절을 했을 때 그는 중풍으로 기동이 불편한 몸을 일으키면서 『절 받을 몸이 못됩니다』고 했다. 그는 72년2월24일(78세)세상을 떠났다. 그의 40여년 전 길림 회고는 이렇다.
『만주 이곳 저곳에서 무장 투쟁을 하다가 아무래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 길래 교회 일을 본다 하고 길림에 가서 동지들과의 연락을 취하면서 냉면집을 시작했다. 만주사변 몇 해 전이다. 음식점이니 아무나 자연스럽게 출입했다. 가고 오는 모든 연락이 우리 집에서 이루어졌다. 길림에 사는 우리 동포들 소식은 모두 그날로 우리 집에 들어왔었다. 이북 김일성의 본이름은 김성주다. 만주사변(193l년)전에 길림서 학교를 다녔다.
길림 감옥에 잡혀 들어간 일은 없었다. 그때 우리 교포의 누가 감옥에 잡혔다 하면 그날로 다 알게 되어 있었고 투옥됐으면 교포들이 돕느라고 야단이었다.』
길림 소년회에 같이 있었던 최진무씨도 김성주의 투옥은 모를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김성주 등이 공산 청년회 조직 때문에 회합한 장소와 날짜까지 탐지해 내고 그 대부분을 검거했던 일제의 길림 총영사관 경찰의 그 자상한 보고문서 중에도 김성주의 체포·투옥을 기록한 대목은 하나도 없다. 김성주는 1929년 하반기에서 1930년 봄 사이에 길림 감옥에 있은 것이 아니다.

<이종락 부대로 다시 모여>
이종락 부대와 남만 학원에 있었던 것이다.
북에서는 김성주가 길림 감옥에 있는 동안 「제국주의론」「식민지 민족 문제」「레닌의 생애와 활동」등 책을 열심히 읽고 조선 혁명의 노선을 깊이 연구했다고 하지만, 이는 혁명가답게 보이기 위한 「투옥」이라는 거짓 경력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남만 학원에서 쫓겨난 김성주 등이 이종락 부대에 다시 모여들었을 때 거기엔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남만 학원 숙정이 있기 전 즉 1929년 12월에 국민부의 군사력은 조선 혁명군으로 발족하고 있었다. 29년4월에 발족한 국민부는 자치 행정부 같은 역할을 하기로 하고 그 국민부를 탄생시킨 모체인 민족 유일당 조직 동맹이 그해 12월에 민족 독립 운동을 전담하는 조선 혁명당으로 개편되면서부터 그 당군으로서 조선 혁명군이 조직된 것이다.
그때에 이종락은 자동적으로 조선 혁명군의 한 소대장이 된 셈이었으나 그는 이미 더욱 반국민부파가 되어 좌파 세력을 규합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므로 자기 부대와 자기 조직의 보전 외에 당이나 군의 중앙 지시를 따를 까닭이 없었다. 국민부를 둘러싼 좌우 양파의 분열은 절정에 달했고 자기 대원들은 남만 학원에서 쫓겨왔으니 이종락은 드디어 국민부와 당과 군에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고나섰다. 1930년8월의 일이다.

<반국민부파로 좌파 규합>
국민부를 탈퇴한 이종락은 다른 국민부 탈퇴파와 공산계 분자, 그리고 정체가 애매한 김광렬의 동아 혁명군 일파 등을 규합하여 「조선 혁명군 길강 지휘부」란 이름의 조직을 새로 만들어 그 본부를 합장 연선 도뢰소에 두었다. 이들의 발족 선언에는 공산주의 슬로건이 등장해 「소비에트의 건설」 「중공 당 지도하의 지방 폭동에의 조직적 참가」 등이 공공연히 주창됐다.
당시의 일제 정보기관은 이와 같은 이종락 등의 움직임에 대해 흥미 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 중심인물의 한사람인 김광렬은 3·1운동에 참가한 후 만주에 와서 일본의 첩보기관에 있었던 사람인데 일본측과 관계가 끊어진 후에는 또 무슨 동아 혁명군이란 것을 조직(1930년초)하는 등 거취가 모호했다는 것이며 또 이종락·고할신 등 국민부 탈퇴 파도 좌경은 했으나 사상과 의식이 그다지 뚜렷한 사람들은 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과격한 공산주의 슬로건이 나오게 된 것은 그들 속에 중공당 만주성위 반석현위의 당원인 김월 등이 끼어 있었기 때문에 그 의견이 슬로건에 나타난 것이었다는 분석이다.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원이 프락치로 끼어 있어서 얼치기 사회주의자들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조선 혁명군 길강 지휘부의 총지휘는 물론 이종락이 했다. 그 밑에 군사부 책임에 김광렬, 정치부책 임에 국민부 탈퇴 파인 안붕이 있었다. 그리고 김성주는 여전히 그 대원이었다. 이종락 등은 하르빈 시의 중국 공산당과 연결을 가지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중공당은 조선 혁명군 길강 지휘부가 「소비에트의 건설」「중공당 지도하의 지방 폭동에의 조직적 참가」등을 표방하고 있다 해도 성분이 명백치 않은 한인들의 조직을 함부로 믿고 손을 잡을 생각을 안 했을 뿐 아니라 한인과 그 단체에 대한 중공당의 원칙은 이미 확고히 서 있던 때이기도 했다.

<얼치기 사회주의자의 모임>
재만 한인 사회에 공산주의가 전파된 것은 우리 국내보다 앞섰으나 그 운동이 조직화된 것은 1925년 서울에 조선공산당이 조직되고 그 만주 총국이 1926년7월에 길림성 영길탑에 설치되면서부터다. 또 재만 한인 공산주의 운동이 조직화되었다 하더라도 일원적으로 조직화된 것은 아니고 서울에서의 파벌 싸움이 그대로 연장되어 만주의 한인 공산주의 운동도 화요파·서울-상해파·ML파의 세 분파로 나누어져서 서로 반목이 심했다. 1928년에 서울의 조선공산당이 무너진 후에도 그 파쟁은 여전했다. 그러던 때인 1930년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따라 만주의 한인 공산주의 운동은 중공당 만주성위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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