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배반의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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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배반의 리더십'은 반전과 감동의 리더십이다.

지지자들한테 돌팔매 맞을 각오를 해야 하기에 때론 비극적 리더십이기도 하다. 잘된 배반의 리더십은 공동체의 통합과 평화를 가져온다.

1993년 9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선 당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인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라빈 총리 간 평화협정 서명식이 열렸다. 언론은 이를 '세기의 만남'으로 묘사했다. 아라파트는 "평화를 위한 싸움이 가장 어려운 싸움", 라빈은 "우리에게 드리워진 슬픔을 걷어내는 날이 오길 기도하자"고 했다.

두 사람은 각기 수천년 적대세력인 이슬람과 유대교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지도자가 됐으면서, 상대방을 이 땅에서 없애야 한다는 지지자들의 요구를 배반하고 공존의 길을 선택했다. 2년 뒤 라빈 총리는 팔레스타인과 타협에 불만을 품은 유대 정통주의 세력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특수한 이익 대신 보편적 가치를 택한 대가였다. 아랍 쪽에도 비극은 있었다. 78년 '캠프 데이비드'협정으로 이스라엘과 협상의 물꼬를 튼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3년 뒤 이슬람 원리주의 장교들의 기관총 세례를 받고 죽었다.

김대중(DJ)전 대통령은 "나는 아라파트란 분을 굉장히 높이 평가한다. 이슬람 원리주의가 팽배해 이스라엘을 원수로 내모는 가운데 현실적인 판단으로 목숨을 내걸고 타협하는 용단을 내렸다. 라빈 총리도 마찬가지다"('나의 길, 나의 사상'에서)고 했다.

그는 "반대편과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도 용기지만, 더 어려운 용기는 같은 편으로부터 배신자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리더십을 보면 인생에 긍지와 의미를 느낀다"고 했다.

DJ는 2000년 6월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배반의 리더십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 DJ도 자신이 내심 지원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대북 송금 특검법안'을 수용하자 깊은 충격과 인간적 배신감을 느꼈을 것 같다.

盧대통령이 집권당의 거부권 요구를 거부한 것은 일종의 배반의 리더십이다. 자기가 속한 정파의 인식을 버리고, 비교적 다수 국민이 원하는 보편적 가치를 선택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여당 대신 야당의 입장을 수용함으로써 초당적 대통령의 이미지도 얻었다. 盧대통령의 배반의 리더십이 정치권에 평화를 가져왔으면 좋겠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