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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배후…권총 출처만 밝혀져|검찰서 발표한 몽양 암살 공범 4명의 진술 내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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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몽양 여운형 선생 암살 사건의 진상을 재조사하고 있는 서울지검 강력부 배명인 부장 검사와 이상현 검사는 6일 하오 이 사건이 단독범 아닌 5인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폭로한 김흥성씨 (51) 형제 등 4명을 소환, 진술을 들었다. 이에 앞서 검찰은 사건 당시 수사를 맡았던 수도관구 경찰청 수사과 강력 주임 박경림씨 (62·당시 경위)도 소환, 김흥성씨 등과 대질하고 저격범 한지근 체포 당시의 현장 상황을 들어 몽양 암살 사건이 단독범이 아닌 조직범행임을 확인했다.
검찰은 이날 김흥성씨 등 4명으로부터 범행 동기·모의 과정·총기 입수 경로·도피 경위·뒤늦은 폭로 이유 등을 조사했으나 ▲김씨 등이 암살에 사상적 교시를 했다는 김영철씨와 양근환씨·염동진씨 등이 이미 작고했고 ▲폭로 이유 등 이들의 진술 내용 중 몇가지가 모순되는 점을 발견, 7일 중에 한지근을 검거하게 해준 신동운씨와 유풍 기업회사 2층 방의 임자였던 김이흡씨·김화곤씨 (당시 수도관구 수사과 부과장) 등을 소환키로 했다.
이들이 검찰의 1차 소환에서 밝힌 진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범인 관계>
한지근의 본명은 이필형이며, 공범이라고 주장하는 김승훈은 김훈, 유예근씨 (일명 유용호)는 유순필이 각각 본명이라는 것.
한지근·김훈·유순필 등 세 사람은 평북 영변이 고향으로 다같이 용문 중학 동기동창으로, 47년 월남, 고하 송진우 살해범 한현우 집에서 기식했다.
「5인 암살조」의 지휘 자격인 김흥성씨와 김씨의 동생 영성씨 형제가 한지근 등 3명과 알게된 것은 김씨가 고하 암살 공범으로 검거된 네째 동생 인성씨의 이면을 알기 위해 한현우 집을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범행 동기>
김흥성씨 등이 몽양을 암살해야겠다는 결심은 당시 극렬 우익이었던 김영철 (작고)과 극우 「테러」 단체였던 「혁신 탐정사」 단장 양근환 (작고) 백의사 단원이며, 장님인 염동진(작고) 등 3인의 사상적 교시가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김씨 형제와 한지근·김훈·유순필씨 등 5인이 김영철을 알게 된 것은 한현우의 고하 살해 동기가 정당치 못하다고 판단, 그 집을 뛰쳐나온 뒤 사상적으로 방황하던 중 우익 청년을 지극히 돌보아 줄 뿐 아니라 고향도 같은 영변이라는 소식을 듣고 김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몽양이 기회주의자이며, 한국민이 정권을 이양 받는 길은 오직 좌·우익이 합작하는 것이라는 군정 장관 「하지」 장군의 성명을 지지하는 등 민족을 분열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는 김영철의 의견에 일치, 몽양 제거를 모의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했다.

<권총 입수 경위>
몽양 암살 모의는 47년7월 초순에, 5차례 모의 끝에 최종 결의는 7월17일로 정했다.
이들이 입수한 권총은 일제 99식 1자루와 45구경 1자루 등 2자루였다. 거사한달 전인 6월20일 김훈씨는 99식 권총을 양근환으로부터 받았다. 양은 『세상이 시끄러운 때인 만큼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라』며 주었다는 것. 그러나 7월10일 염동진으로부터 45구경 권총을 구해 받을 때는 몽양 살해용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거사 후 김훈씨가 갖고 있던 99식 권총은 충남 대전 출신 제헌의원 성낙서씨에게 맡겼다고 진술했다.
김영철은 평북 영변 출신으로 1920년 (28세 때) 상순 임시 정부의 행동 대원으로 당시 일본 정부가 미국 하원 의원들을 초청할 때 일본 정부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만주에서 폭탄을 품고 들어오다 아숙원에서 검거되어 10여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엔 극우파 청년 대원으로 활약했다는 것. 또 양근환은 일제 때 이완용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쳐 오랜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 현 종로구 수송동 46에 혁신 탐정사를 차려 수십명의 청년을 거느리고 공산당 간부 암살에 앞장섰었다.
장님이었던 염동진도 「백의사」란 극우 단체를 만들어 행동 대원을 양성, 이북에 파견하여 공산당 간부들을 암살해 왔다는 것이다.

<배후 관계>
김씨 등은 이날 무기를 구해준 이들 세사람이 암살을 지시한 것은 아니며, 다만 자신들이 거사할 수 있는 정신적 지주였을 뿐이라고 말해 공범 5인 이외의 배후는 부인했다.

<박경림씨 진술>
박씨는 이날 『당시 한지근을 유풍 기업 2층에서 검거할 때 3, 4명의 청년이 화투 놀이를 하고 있었다』고 진술, 김씨 등의 말과 부합되는 진술을 했고 유순필씨와 대질했을 때 서로가 안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한이 압송 직전, 『동지들과 헤어지는데 기념 촬영을 허가해 달라』고 하여 원판을 없애되 사진은 1장만 인화한다는 조건으로 촬영을 허가, 함께 있던 청년 3, 4명이 사진을 찍은 일이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들 공범 4명 중 김흥성씨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96에 살면서 고무신 행상을 하고 김훈씨는 관악구 상도동 산64 처남 집에서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고, 유순필씨 (서울 성북구 장위동 16의 49)는 아성실업 대표로 일본에 화강암을 수출하며, 김영성씨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는 목수로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씨 등은 사건 후 아무런 제재나 부자유스러운 분위기 없이 마음놓고 종전과 같이 생활했으며, 군에 입대했던 4∼5년간을 제외하고는 4명이 자주 만나 친형제처럼 도우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이들은 전화로 서로 연락, 작년 7월7일 중구 다동에 있는 한수 다방에서 만나 폭로하기로 결의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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