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7)|제9화 고균 김옥균의 유랑 행적기 (9)|제2장 일본 속에 맺힌 한인들의 원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김옥균의 유배 행적을 쫓아 기자는 9월말, 이번에는 북해도 땅을 찾아 나섰다.
하네다에서 제트 여객기 편으로 1시간20분만에 내려선 북녘 땅 삽보로의 지도세 (천세) 공항은 벌써 추색이 완연했다. 광막한 들판을 뚫고 왕래하는 차가 드물어 아직도 넓어 보이는 고속도로를 30분 가량 달려 삽보로 시에 들어서면서 곧장 시가 중심부를 지나쳐 서남방의 한가한 길목에 자리잡은 삽보로 시립 도서관을 찾았다.
전화를 걸어둔 봉사계장 쇼오지 여사는 잠시 외출 중이었으나 신분을 밝혔더니 곧장 관장실로 안내한다.
초로의 사이또 관장은 자기 방에다 관계 자료들을 꺼내다 진열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앞서 기자는 삽보로에 유배된, 따라서 삽보로에 남아 있을 김옥균의 흔적을 찾기 위해 삽보로 시사 편찬위로 전화를 걸었으나 이미 해산, 다시 시 교육위 문화 재계를 불렀으나 아는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사정 얘기를 하고 부탁을 했더니 그날 밤에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사방으로 수소문했더니 시립 도서관에 자료가 있더라면서 장자 여사를 소개해 주는 것이었다.
제등 관장은 먼저 『김옥균 은둔 자료』라 쓴 기록철을 펼쳐 보인다. 김옥균이 삽보로에서 머무른 집 주소와 사진·가옥의 내부 사진들이 철해져 있고 북해도 유배 경과 등도 적혀있다.

<낙관엔 「한국 김옥균」>
그밖에 김옥균의 휘호를 찍은 사진들도 나왔다. 실제 유물로서는 오동나무 상자 속에 솜으로 싸서 소중히 넣어둔 청동 화병 한쌍이 있다. 겉에 복숭아와 꽃이 부각된 높이 10cm쯤의 자그마한 것이었다. 이 화병 뒤편을 보니 「김옥균 유십, 김자원삼랑장」이라 새겨져 있고 상자 뚜껑에는 「고균 김옥균 유십 증위 찰황 구거 가비품, 지우 김자원삼랑」이라 적혀 있다. 아마도 삽보로에서 김옥균이 거처에 두고 쓰던 것을 도오꾜로 돌아갈 때 가네꼬 (김자)씨가 기념으로 받아 보관해온 것인 듯 하다.
이밖에 두산만이 김옥균을 생각해서 쌌다는 「사고인」이라는 휘호가 있고, 김옥균의 휘호는 사진을 찍은 것이 병풍하나, 두루마리 4점 등이다. 이 가운데 특이한 것으로는 낙관에 한국 김옥균으로 된 것이 한 점 있다는 점이다.
휘호 하나는 「기회허광, 석전대형정, 고균옥」이라 돼 있다.
일본 정부가 북해도 개척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1889년. 김옥균이 북해도로 유배된 해다.
따라서 당시의 북해도는 황막한 미개지였으며 지금까지도 일본에서는 그 당시의 북해도 이주에 얽힌 애화가 끊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온다. 한국에서라면 간도 이주민들과 비슷한 이미지라고나 할까-. 변경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딱 어울렸을 미개의 북녘땅에 유배된 김옥균이 『허허한 광야에 생각을 달린다』 고 휘호한 심경의 처절함이 가슴을 뭉클케한다.

<지인과 요정 출입도>
자료철의 설명을 보니 이 휘호에 그 「석전대형」이라고 돼 있는 사람은 사이또 (제등) 약국의 「번두」 (주=지배인)였다는 것. 나중에 김옥균이 거처했던 집의 현재 위치를 찾기 위해 북해도청에 가서 만난 촉탁 마쓰다 (송전행사랑)씨에게 혹시나 해서 물어 봤더니 유서 있는 약국으로서 지금도 제등 약국이 있다는 것이다.
세월 따라 약국도 성장해서 지금은 주식회사 제등 상점으로 승락, 주로 의약품을 도매하고 있으나 판매용 약국도 경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전화를 걸었더니 외출 중이어서 밤에 호텔에서 사장 자택으로 다시 전화했더니 사이또 (제등국태랑) 씨가 전화를 받는다.
당년 82세라는 제등 사장은 석전씨 얘기를 기억하지는 못했으나 『부친 (제등홍보) 한테서 김옥균 얘기를 가끔 들었는데 부친과는 퍽 친하게 지낸 듯 가끔 「동경암」이란 일본 요정에 같이 갔던 얘기를 하더라』고 전한다. 제등 사장 자신도 젊었을 시절인 2차 대전 전에 동경암에 갔을 때 응접실 벽에 걸린 김옥균의 휘호를 본 일이 있다고 했다. 이 「동경암」은 30여년 전에 폐업했고 부친도 26년 전에 작고했다는 얘기.
시립 도서관에 있는 이들 김옥균 관계 자료 중 「휘호」에는 대부분이 「김옥균 도산 주택 기념, 보원원이씨 기증」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기록에는 김옥균이 삽보로에서 거처한 집은 두곳. 하나가 도산 주택, 또 하나는 도청 남문 앞 북 2, 서 6 동북각 「도청 부장급 관사」다. 따라서 앞에 밝힌 휘호들은 모두가 도산 주택에 있을 때 쓴 것인 듯 하다.
제등 관장에 따르면 원산 주택은 현 원산 공원 안에 있는 찰황 신사 뒤편에 있었다는 얘기이나 현장에 가보니 지금은 뽕나무밭이 돼 있다.
두번째 도청 남문 앞집은 17년 전인 1957년에 북해도 개발국장 사택으로 쓰던 것을 헐어 버렸으며 헐기 전에 유적을 필름에 담아 관계 비품과 함께 향토실에 보존키로 됐다고 당시의 북해도 신문이 보도하고 있다.
사진을 보면 이 관사는 목조 2층집. 10조짜리 2층방에 김옥균이 거처했는데 의자와 작은 책상, 그리고 화로 등이 놓여 있다.

<거처하던 집은 헐려>
김옥균의 유배 당시만 해도 이 도청 남문 앞 일대는 관사 지대. 때문에 도청 관재계에 알아봐도 문제의 관사가 어느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궁리 끝에 북해도 개발국을 찾아가서 17년전의 개발 국장을 조사했더니 지금 일철 시멘트에 근무하는 오가와씨라 알려준다. 다시 소천씨를 만나니 자기의 전임 국장이 그 관사에 살았다면서 정확한 지점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은 고층 건물이 즐비한 일각에 서 있는 4층짜리 도남 병원 자리였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둥근 돌에 「김옥균 기념」이라 새겨진 특이한 모양의 기념 석비가 사진에만 남아 있을 뿐, 실물의 행방은 묘연해진 사실이다. 이 석비는 김옥균이 머무른 개발국 장관사들에 건립된 것으로서 건립자가 보원원이씨. 이등장우문이란 사람의 창의에 의해 풍평천에서 돌을 실어와 세운 것이다. 이것을 「찰황시중지도이조칠정목 강면」이란 자가 1963년10월4일자로 된 양수서 한장을 도서관장 앞으로 써 놓고 가져가 버렸다.
현 제등 관장은 전임자의 한 일이라 알 수 없다면서 딱한 듯이 양수서만을 보여주는데 강민은 인수해 가는 이유로서 전국적으로 김옥균 관계 자료를 수집, 일시 보관했다가 조국 연구실에 보낼 예정이라 써 놓고 있다.

<북한선 고균 연구 활발>
추측컨대 조총련계에서 가져가 평양으로 보낸 듯하다. 기자가 구주에 사는 「데라자와」 (사역)씨가 김옥균 관계 자료를 보관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연락을 취했을 때도 같은 좌절감을 느낀 일이 있다. 구주의 조총련 조직을 통해 관계 자료들을 북한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북한은 조총련에 지령, 상당량의 김옥균 관계 자료 등을 수집해 갔을 듯하다. 북한에서 의외로 김옥균 연구소가 활발한 것으로 미루어서도 수긍이 가는 일이다.
북한이 왜 김옥균에 관심을 두는지, 그 이유는 현 단계로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북한서 간행된 『망명 시기의 김옥균』이 철두철미한 일본의 침략주의 비난으로 시종하고 김옥균을 그 희생자로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그 의도의 일단을 추측할 수있을 뿐이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