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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10분 내에 … 연습 연습 또 연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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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8호 27면

중국 출신의 랑랑(32). 세계에서 가장 바쁜 피아니스트다. 화려한 쇼맨십으로 유명하다. [Philip Glasser]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는 누굴까? 객관적 수치나 통계 자료는 없지만 필시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했던 피아니스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누굴까? 10년 전이었다면 ‘V. 호로비츠’나 ‘A. 루빈스타인’ 정도일까? 그렇다면 지금은? 아마도 그 사이 등장한 이 ‘다크호스’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13억의 확실한 지원군을 두었으니 그가 이전 100년의 아성을 무너뜨렸다 우겨도 무방하리라 본다. 중앙SUNDAY를 읽는 독자라면 100%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그 이름, 랑랑(郎朗·32)이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내가 만난 천재 ② 랑랑

1996년 8월, 초등학교 4학년이던 나는 당시 선생님의 제안으로 전 해에 그랬던 것처럼 피아니스트 인청쭝을 사사하기 위해 미국 보스턴 여름 음악캠프에 참가했다. 이 음악 학교는 대만 출신 화교가 운영하던 것이라 한두 명의 한국인, 태국인, 재미교포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만에서 건너온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국 본토 출신 학생이 한 명 온다고 했다. 그것도 지난해에 열린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Tchaikovsky Music Competition for Young Musicians)의 우승자라고. 영 차이콥스키라면 지난해 캠프 참가자 중 월등한 실력을 자랑하던 셜리도 1차에서 탈락했다던 그 무시무시한 콩쿠르? 그런 콩쿠르의 1등은 얼마나 잘 치는 사람일지 벌써부터 궁금했다.

처음 그를 본 건 구내식당. 꽤나 큰 키에 둥근 얼굴, 거기에 둥글둥글 큰 눈이 마치 굶주린 맹수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그는 멀리서 봐도 확연히 구분될 ‘중국인’이었다. 크게 친근한 인상은 아니었는데 그건 얼핏 보기엔 하나도 안 닮은 것 같지만 실은 그 크고 매서운 눈이 똑 닮은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를 보고 나는 당시 읽던 그림역사책에 나오는 중국 홍위병이 나이를 먹으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그의 아버지는 음악가가 되기를 열망했으나 문화혁명으로 꿈이 박살 난, 절망한 음악가였다. 이 둘이 서로 2m 이상 떨어지는 걸 나는 3주 동안 딱 네 번 정도 봤는데, 아버지가 연습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물을 떠다 줄 때, 그리고 아들이 무대에서 연주를 할 때, 각각 두 번씩. 그런 그의 아버지 덕에 처음 며칠간 난 그가 말도 못하고, 웃을 줄도 모르고, 놀지도 못하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인청쭝 선생님의 첫 레슨을 구경하러 들어가 인생 최고의 문화 충격을 경험했다.

알고 보니 그의 목소리는 번쩍 뜬 그의 두 눈보다 훨씬 컸다. 스승의 가르침에 핏대를 올리며 스승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대들며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은, 6년간 한국의 내 선생님께 제대로 된 목소리 한 번 내 본 적이 없는 나에겐 무협지의 한 장면 같았다. 웃긴 건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그의 얼굴이었다. 그와 인청쭝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장난을 쳐가며 피아노를 치며 서로의 에너지 레벨을 시험하다가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레슨을 끝마쳤다. 정말 이상했다. 하다못해 위인전 속의 베토벤도 피아노 연습을 하러 방으로 들어오면 당장 내일 죽을 아이처럼 떼를 쓰는 탓에 아버지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날 이후로도 그는 밥 먹는 시간은 절대로 10분을 넘기지 않고 아침에는 무조건 7시에 일어나 연습실로 향했다. 우리가 시내 구경을 갈 때도 그는 단 한 번도 우리와 함께 가지 않고 아버지와 연습실에 남았다. 그가 유일하게 함께한 여행이 한 번 있었는데 그건 바로 탱글우드 음악제 구경이었다. 그날 우리 모두가 본 그는 말도 웃음도 사실은 너무 많은, 놀기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몇몇 외국인 친구들한테는 서투른 영어를 들키고 싶지 않은 듯 수줍은 웃음만 날리며 선뜻 다가오지 않는, 뭔지 모를 대륙의 순박함도 있었다.

며칠 후 그는 캠프에서 쇼팽의 연습곡 24곡 전곡을 연주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주하는 그의 음악에는 스승 인청쭝과 같은 애수는 없었지만 날것 그대로의 순수함이 있었다. 그것은 한 소년이 자기자신을 온전히 바쳐 얻어낸 그런, 삶과도 같은 음악이었다. 그의 음악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웃고 울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우리보다 며칠 먼저 캠프를 떠난 그의 얼굴을 다시 본 건 몇 년이 채 흐르지 않은 2000년대 초반, 한 잡지의 레코드 리뷰난에서였다. 하이든, 라흐마니노프, 브람스, 차이콥스키 등의 수록곡들, 그 밑에는 ‘탱글우드 세이지 오자와 홀에서의 라이브 레코딩’이라고 쓰여 있었다. 2003년 초에는 금호그룹의 고 박성용 명예회장님 댁에서 재회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와 그의 연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특히 연주를 끝내고 한 사람 한 사람 먼저 찾아가서 말을 건네는 모습은 사뭇 낯설었다. 나에게도 먼저 다가와 “아직도 너의 그 모차르트 연주가 기억난다”고 말했다. 예전 그 순박하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그로부터 10여 년간 그가 이뤄낸 성과들은 어마어마하고도 다양했다. 한편의 경극을 공연하듯, 음악 자체보다도 훨씬 더 많이 울고 웃는 그의 몸짓과 표정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특유의 스타성, 다양한 팬들과 소통하는 친화력은 그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지휘자 모두와 연주하게 만들어주었다. 8000만 명의 어린이들이 그를 따라 피아노를 배우게 된 중국 시장은 그야말로 크게 열렸다. 단순한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넘어 문화계의 아이콘이자 중국의 상징이 된 그. ‘낭중지추’라고, 주머니 속의 뾰족한 송곳은 숨길 수 없다 했던가. 이제는 세계인에게 가장 낯익은 피아니스트가 된 랑랑. 그런데 아직도 나에게는 조금 낯설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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